1521년 4월 17일 오후 4시에 마르틴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취임한 카를 5세 앞에 섰습니다. 황제 앞으로 걸어가는 루터 주위에는 독일의 제후들과 교황청 특사들 그리고 카톨릭 주교들이 엄숙하게 자리를 채우고 공격적인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두려움이라곤 한치도 찾아볼 수 없는 루터가 신뢰한 것은 오직 성경의 권위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었습니다.

루터, 반박문 발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는 있었지만 한 수도사에 불과했던 루터가 황제와 교황을 맞서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심문관의 취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들은 모두 당신이 쓴 것인가?” 루터가 대답합니다. “네.” 장엄한 심문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당신이 쓴 글 중에 취소할 부분이 있는가?” 한참을 생각한 후 루터가 대답합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황제는 그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루터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굽힐지도 모른다고 염려했습니다.
루터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것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속죄에 대한 잘못된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중세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해 개인이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와 금식 또는 자선이나 기부 등을 통해 보속(satrisfacio)을 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면죄부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부모님의 영혼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면죄부로 구원의 증표를 판매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의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루터는 구원이란 면죄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거센 바람처럼 독일 전역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카톨릭의 근간을 뿌리 채 흔든 루터의 생명이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

하루를 숙고하고 난 다음 날 황제 앞에 선 루터는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이 둘은 오류를 범해온 것이 사실이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펼쳐 왔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지혜롭지도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 말로 끝을 맺었다. “저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의 말은 폭풍의 핵과 같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로마교황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황제는 교황청 특사가 작성한 문서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보름스의 황제칙령’입니다. 그로부터 루터는 이단자로 정죄 받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도 이단자로 정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책들을 불살라 없애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생명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채로 루터는 보름스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라는 확신이었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다는 굳건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천만인이 큰 길을 걸어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묵묵하게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 이들이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천만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한 분을 향해 진리의 길을 걷는 한 사람을 통해 민족을 변화시키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류응렬
목사이며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과 개혁신학', '에베소서 설교하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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