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의 밤이 깊어가면서 1920~30년대 조선 사회는 좌절과 실의가 팽배하였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빛이어야 할 교회는 교권(敎權)과 신학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으로 힘을 소진하면서 점점 세상의 염려거리로 전락해 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바로 그 ‘초월’ 신앙에 터하여 자신을 바꾸고 세상 질서에 맞서던 조선 기독인의 기개는 사그라지고, 도리어 세상과 짝하며 그 질서를 닮아가는 모양새였습니다.

기독교, 생명력을 잃어가다

기독교가 앞장서고 온 겨레가 나섰던 3·1운동이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식민 통치가 깊어가자 교회는 이른바 ‘순수 종교’를 부르짖으며 민족으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교회는 결코 사회 문제, 노동 문제, 평화 문제, 국제 문제를 말하는 곳이 아니라”며 민족의 아픔,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애오라지 ‘저 세상’만을 바라보는 곳으로 바뀌어 갔고, “기독교는 예수가 번민하고 투쟁한 일들을 외면하는 지배 계급과 부자들의 종교”가 되었다는 비난과 “가난에 찌들고 권력에 눌려 사는 민중의 삶과 유리되었다”는 질타가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 민족사의 암흑기를 맞아 겨레와 함께 자유와 해방의 걸음걸이를 이어왔던 기독교, 그래서 겨레의 자랑이자 희망이었던 기독교가 그 생명의 기운을 잃어갔던 것입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계속된 교세 확장으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기독교 공동체는 25만 명의 신도와 이들을 이끄는 성직자들, 그리고 노회와 연회 같은 상급 조직들, 교회 관련 학교들, YMCA, YWCA, 교회 신문, 병원이나 복지 시설들을 두루 갖춘 거대한 사회·경제 집단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기대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였습니다.
예컨대 1924년에 장로교와 감리교만도 1,266명의 성직자들과 1,844명의 교회 직원, 3,000명에 이르는 교회 관련 학교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문화·종교 계급으로서 그들이 사회·경제적으로 기대고 있는 기독교가 세상 질서에 맞서지 않는 ‘순수 종교’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들이 기독교를 움직이는 교권 세력을 이루면서 교회와 신학은 그들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고, 기독교는 본래의 초월성을 상실하고 그냥 하나의 사회제도로, 제도 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만이 삶의 기준

그즈음 ‘회개’와 ‘신생’을 부르짖으며 기독교의 갱신을 추구한 이들이 나타났으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용도였습니다. 일찍이 민족의식에 눈을 떠 독립운동에 투신, 4차례에 걸쳐 3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는 이용도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애오라지 기도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맡기는” 새사람으로 거듭났으며, 기도와 설교를 통해 조선 교회의 갱신과 소생에 이바지하겠다는 그의 사명 의식 또한 더욱 깊어갔습니다. 그리하여 1929년에서 1933년 그가 죽기까지 100여 차례의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회개가 일어나고 생명의 기운이 되살아났습니다. 기도야말로 일제 식민 통치 아래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희망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힘의 진원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이용도는 교리나 신학을 실천의 근거나 진리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만이 삶의 기준이고, 신앙의 초점이었습니다. “예수를 유일 최애(最愛)의 애인으로 삼고 언제든지 그만을 사랑하다가 그를 위해 이 생명을 바치고 싶어요.” 그에게 진정한 신앙이란 생명의 역환(易換), 즉 자신의 생명과 예수의 생명이 바뀌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의 역환을 경험하지 못한 채 교리와 신조를 앞세우는 선교사들의 우월감, “예수의 피도 버리고 살도 버리고 그 형식과 의식만 취하는 현대 교회”와 “목사직을 밥벌이로 타락시키는 월급쟁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이용도가 그리운 이유

교권에 취해 ‘예수’를 버리고 ‘세상’을 좇는 교회와 성직자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기독인의 삶은 안락한 종교 생활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예수를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용도는 개인과 민족이 겪는 고난 속에서 예수를 찾았으며, 그 예수는 영광의 예수가 아니라 비천한 예수이고 무력한 주님일 수밖에 없기에, 그에게 “고(苦)는 선생, 빈(貧)은 애처, 비(卑)는 궁전”이었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진리를 배웠으며, 가난을 사랑하며 가난 속에서 살았으며, 그의 마음은 늘 겸비하여 낮은 데로 향하였습니다.
이용도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종교개혁의 근본 원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단계의 신앙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사랑의 화신이 되어 사랑의 하나님에 삼키운” 사랑시대의 신앙을 역설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며, 사랑은 곧 사람 그것”이기에 자기를 초월하는 몰아(沒我)의 사랑, 즉 ‘하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헐벗고 굶주린 걸인에게 자기 이불을 주고 옷을 벗어 주는”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그는 회개와 기도와 사랑을 통해 메말라가는 조선 교회를 소생시키고, 엄혹한 삶을 살아야 했던 뭇 영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루하루를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 갔습니다. 오늘 이용도가 그리운 이유입니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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