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생을 살다보면 지키고 보존하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한번쯤은 좀 바꿔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 것들도 많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 문화 그리고 미풍양속들은 우리 모두가 지키고 보존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마음을 편치않게  만드는 것들은 좀 바뀌어졌으면 바램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을 아주 즐겨 사용하며 ‘날마다 개혁되어 나가는 개혁주의 교회’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흔히 간과할 수도 있는 작은 일부터 좀 바꾸려고 함께 노력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볼 때가 많이 있다. 

▲ 첫째, 교회 직분을 계급 구조로 보는 의식을 정말 좀 바꿀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교회의 직분은 위계적 계층 구조가 아니라 기능적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유기체적 협력 구조이다. 목사, 장로, 집사, 평신도는 높고 낮음의 계급 구조가 아니다. 교회에서 섬김을 받고 높임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이 주님마저도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지체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교회의 직분을 계급구조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계적 구분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직분자들이 그저 성도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질 뿐이다. 교회 직분을 계급 구조로 보는 의식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 둘째, 이름내기 문화를 정말 좀 바꿀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타락한 인간들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거리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는 지금 도를 지나친 정도에까지 와 있다. 교단 연합행사 프로그램에는 고문위원, 자문위원, 준비위원, 실행위원 등 목사와 장로들의 이름들이 수없이 열거되어 있다. 예수님 때문에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높혀 준 그 주님을 높이기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높이고 이름을 내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스폰서를 찾아 대회 경비를 조달해야 하고, 참석을 독려해야 하는 실무자들의 고충을 헤아려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사에 참석한 성도들이 자기들 교회의 목사나 장로들의 이름을 찾는 ‘퍼즐’을 풀다보면 초점이 되어야 할 예수님을 놓쳐버리게 된다. 대회를 준비하는 분들의 수고가 지대하지만,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스스로를 무대 뒤로 감출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보일 줄 아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

▲ 셋째,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교회로 좀 바꿔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작품인 창조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도 갖지 않고 제대로 돌보지 않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우리의 구속은 분명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끝나지 않고 공동체적 차원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그러나 “예수-천당”과 “영혼-구원”이라는 도식은 신앙의 공동체적 특성과 창조 세계에 대한 관심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구속의 우주적 의미를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그래서 요즘은 창조 세계의 구속에 관한 설교도 없으며 환경 주일을 지키고 실천하는 교회도 찾기가 힘든 실정이다. 모든 창조 세계가 구속 사역의 대상이라는 진리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나 구속의 기쁨이 결코 감소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는 말씀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오히려 구속의 의미는 더 풍요하게 드러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심각한 환경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창조 세계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여 기쁘게 봉사함으로써 환경 문제에서도 신앙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

▲ 넷째, 개인주의적인 신앙교육의 문화를 협동하고 협력하는 문화로 좀 바꿀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경쟁적인 삶의 양태를 영위하고 있다. 학교교육은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목표로 삼고 있다. 경쟁에서 실패한 아동은 패배자로 낙인찍히게 마련이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교회교육은 상처받은 아동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쌀 줄 아는 지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국 어린이 대회’와 같이 신앙공동체에서 개최하는 여러 종류의 경연대회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신앙공동체에서 개최하는 여러 대회를 경쟁 심리를 조장하는 형태가 아니라, 함께 기뻐하며 고통의 짐을 나누어지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바꾸어 갈 수는 없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독교학교 설립도 마찬가지이다. 개교회의 힘만으로 불가능하지만 한국교회가 교파를 초월해 협력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많은 내용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소하게 볼 수도 있는 이런 몇 가지 정도의 단편적인 일들만이라도 좀 바꾸어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신앙공동체는 진정 개혁하는 신앙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성수
고신대 총장이며 기독교교육학 박사인 그는 인간을 존중하는 기독교 교육풍토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