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국교회사 이야기 ⑪

 

“조선의 지도 위에 검은 먹을 발라가며 가을바람 소리를 듣노라.”
조선의 상실을 애달파 하였던 어느 시인의 예견대로 식민지 조선은 마치 검은 먹을 바르기라도 한 듯 역사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조선은 일찍이 없었던 참혹한 무단통치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일제는 강력한 헌병 경찰 제도를 구축하여 온 나라를 창살 없는 감옥으로 만들고, 모든 조선인에게 천황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이기를 강요하면서 ‘조선의 일본화’를 밀어붙였습니다. 이에 조금이라도 대들라치면 곧바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어 척결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암울한 현실과 마주하여 조선 기독교는 신앙 부흥 운동을 통해 형성된 응집력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나라 안에서 민족 교육과 계몽 운동을 펼친 것은 물론이고 나라 바깥에서도 학교를 세우고 한인 자치 조직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민족정신을 키우고 독립군 양성,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 등을 벌였습니다.
중국의 여운형·선우혁·김규식·김구, 북간도의 박정서·정재면·이동휘·김약연, 서간도의 이회영·이동녕, 미주 지역의 안창호·이대위·박용만·이승만 등 당시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1910년대 조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독립운동에 깃든 천국의 소망

이렇듯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의 맨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내면에 깊이 새긴 초월 신앙,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죽어가는 이웃을 일으키려는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세상 나라를 이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선가를 부르며 요단강을 건넜고, 유대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지었듯이”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하나님을 노래할 날이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 날이 올 때까지 인내하자”고 서로 다독거리며,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설교의 몇 구절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완력과 병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사랑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할 것입니다. 신앙력과 기도의 힘과 모범력과 사랑의 힘이 있고 더욱 성령의 힘이 충만하면 능히 삼천리강산을 구원하고 세계도 구원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전 세계 인류를 위하여 눈물이 진한 끝에 피땀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거울삼아, 이 눈물이 진하여 희생하는 시대를 당하였으니, 여러분이시여! 생명을 아끼지 말고 재산을 돌아보지 말아서 근심하며 슬퍼하는 자의 제2구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하기를 두려워 맙시다. 싸웁시다. 뿌릴 것 뿌리고 거둘 것 거두며 보이는 원수, 보이지 않는 원수 다 쳐 물리칩시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인내하고 일해야 합니다. 죽든지 살든지 동족의 행복과 인류의 향상과 천국의 강림을 위하여 아버지 뜻대로만 하겠사옵나이다.”

조선의 밀알이 되어

이러한 신앙의 터전 위에서 조선 기독교는 3·1운동을 일으켰습니다. 3·1운동의 준비 과정, 이를테면 중앙 지도부의 형성과 현장 일꾼의 조직으로부터 대중 동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와 기독교인의 손이 닿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전체 조선 인구의 1퍼센트에 불과한데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 그리고 체포된 주동자의 22퍼센트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퍼져있는 교회와 선교 학교가 시위운동의 근거지가 되어주었습니다. 기독교를 빼고는 도무지 3·1운동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한창인 마당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종교 단체와 연대하여 정치 운동을 벌인다는 것이 흔쾌하지 않을뿐더러 자칫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누구보다 고심했던 이가 신석구 목사였습니다. 독립운동 참여를 권고 받은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그 답을 찾기 위하여 기도하다가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 큰 죄가 아니냐?”는 음성을 듣고서야 3·1운동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또는 수백의 심중(心中)에 민족정신을 심는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삼남매 심중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1운동의 밑바탕에는 이처럼 기독인들의 고뇌어린 기도와 초월 신앙, 즉 예수를 좇아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믿음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빛과 소금’이며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3·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는 불의한 질서에 맞서는 정의와 사랑의 정신을 일깨우고 우리 겨레가 나아갈 길, 곧 평화와 평등을 추구하는 자주독립국가의 전망을 제시하고, 민족과 더불어 한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말입니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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