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대 선교사 이야기 ⑨ 루이스 린튼 선교사

▲ 40년의 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순천과 북한에서 결핵사역을 하고 있는 루이스 린튼 선교사와 함께. 왼쪽 끝이 한병선 대표, 그 옆이 린튼 선교사.

<지난호에 이어> 전쟁 직후 한국은 너무도 비참한 상태였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는 너무 가난하고 비참한 상황이라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자녀의 결핵으로 시작된 결핵퇴치운동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시작된 것이 병원 일이다.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을 광주까지 차에 태워 가면 환자들은 광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죽고 말았다. 그녀는 생각을 바꿔 광주에 있는 의사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순천에 내려와 진료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녀의 집에서 처음 진료를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마당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어느 날, 그녀의 자녀들이 결핵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결핵 걸린 사람이 너무 많았고 전염성이 강해 한 명이 걸리면 온 가족이 전염되고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것을 계기로 결핵에 결린 사람을 방문하게 된다.
그녀는 한국에서 가장 큰 일은 결핵을 퇴치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일 후로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결핵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결핵 퇴치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결핵퇴치운동은 60년에 시작되어, 63년에 순천 결핵 진료소를 개설, 65년에는 무의탁 결핵환자를 위한 결핵요양소를 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은 길을 열어주었다. 나중에는 결핵 환자 호스피스인 보양원 마을을 만들어 죽을 때까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왔다.  지금도 순천에 가면 진료소와 결핵 요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한국정부는 국민훈장 목련장, 적십자 봉사대상, 호암 사회봉사상 등을 수여했다.
그녀는 의료품을 지원하는 일, 의사를 지원하는 일, 사람들이 와서 치료받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은퇴 후에도 이어지는 이웃돌봄

그녀의 남편은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세우는 복음 전도사의 삶을 살다가, 한국에서 사역한 지 30년 만인 1984년에 순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10년 더 사역을 하다 40년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정식은퇴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자녀와 함께 순천과 북한에서 지속적으로 결핵 퇴치 사업을 하고 있다.
인애자(루이스 린튼 여사), 그녀는 자신이 예수의 종이고 그리스도인이란 것을 본질처럼 생각하고 늘 그 삶 속에 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일은 겸손으로 가리고 한국 사람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사랑스럽고 긍정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할지 배움을 주었다.
그녀의 자녀 6명 중 절반이 한국에서, 혹은 한국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부모세대가 남겨놓은 일을 해나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제임스는 대전 한남대에서 건축을 하는 곳을 돕고 있고 막내인 인요한 의사는 연세의료원 국제진료소장으로 한국에 살면서 부모님이 남겨두신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며느리 하이디는 북한에서 의료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자신은 늘 사랑받고 있다고 특히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사랑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린튼 선교사. 멀리서 온 나그네, 그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감사를 행복하게 받는 것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한병선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로 한국의 3세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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