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들의 탈선이나 교권 추락에 대해, 체벌 금지 때문이란 말이 철지난 유행어처럼 돌기도 한다. 그러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체벌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무섭게 대하거나 체벌을 했던 선생님일수록 졸업하면 더 고맙게 떠오른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으나 내 경우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언제고 체벌은 불합리하고 억울할 뿐이었다.

사랑없는 ‘사랑의 매’

중학교 때 보도블록을 밟지 않고 운동장으로 등교했다는 이유로 매를 맞은 적이 있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것도 아니다. 보도블록 바로 옆을 걸었을 뿐이다. 실내화를 신은 것도 아니니 위생 상태에 대한 조치도 아닌 것 같다. 선생님은 내게 매를 든 것도 모자라 운동장까지 뛰라고 했다. 난 운동장을 뛰면서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것일까 생각해봤다. 평소 내 행동이 불만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난 아무래도 ‘범생이’였고 웬만하면 선생님 말에 고분고분한 학생 축에 들었다. 어쨌든 이런 대우는 불합리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도무지 내가 그러한 체벌을 받아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땐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단 1초만 늦어도 교문을 닫아 버렸다. 지각생을 잔뜩 모아놓은 다음, 아침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직전, 길게 줄을 늘어서서 손바닥을 내밀게 했다. 그냥 매가 아니라 선생님은 자신이 신던 슬리퍼를 벗어서 그걸로 우리들을 때렸다. 모멸감을 느끼라는 이유에서였다. 선생님은 우리를 때리면서 갖은 악담과 모욕을 퍼부었다. 지각을 한 우리들은 대학에 들어가기도 힘들 뿐더러 사회에 나가서도 인간쓰레기가 될 것이 뻔했다. 물론 의도는 적중했다. 우리는 지각을 한 나 자신이 아닌, 모욕감을 준 선생님을 모멸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물론 나만 운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사랑의 매’로 체벌하고 그 매로 인해 올바르게 자란 학생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가가 과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

어쨌든 내 경우엔 체벌 보다는 ‘편애’가 오히려 긍정적이란 생각이 든다. 국어사전적 의미로 편애가 ‘어느 한 사람이나 한쪽만을 유달리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편애는 받는 쪽보다는 그렇지 못한 쪽에서 느껴지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이 부각되니,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받는 쪽 입장으로 생각해 볼 때, 학창시절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그 ‘편애’가 아닌가 싶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 뛰어나지 않은 편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었던 ‘편애’, 보잘 것 없는 재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확대 해석하여 격려해주는 ‘편애’ 말이다.
내게 편애를 해주었던 선생님은 늘 고맙게 떠오른다. 고작 서너 줄 짜리 그림일기의 글을 잘 쓰면 얼마나 잘 썼겠는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내가 쓴 글 보다 더 많은 수식어와 표현으로 칭찬을 해주었다. 그 뒤로 난 글을 쓰는 일이란 ‘어른들의 칭찬을 받는 즐거운 일’이란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더구나 난 소설가 치고 수학이나 과학 과목을 좋아하는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그렇게 된 데는 중학교 선생님의 ‘편애’ 덕분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학년별로 성적이 뛰어난 아이들을 과학반에 들게 했다. 난 그 반에 들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순전히 선생님의 ‘편애’ 덕분에 과학반에 들 수 있었다. 이론으로만 배우던 것을 직접 실험하는 활동을 했는데, 그곳에서 난 과학 과목에 제법 흥미를 느끼게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늘 고맙게 떠오르는 선생님은 내게 과분한 편애를 해주었던 분들이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좀 더 많은 선생님들이 모든 아이들에게 그러한 편애를 많이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배지영
200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란씨"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오란씨>(민음사)와 장편소설<링컨타운카 베이비>(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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