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의 어둠이 짙게 드리우고 기댈 곳 없는 조선 사람들이 고통의 절규를 토해내던 20세기 벽두, 기독교는 스러져가는 겨레를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기도회를 열고 민족운동을 벌이는 한편 역사의 위기를 신앙의 갱신으로 돌파하려는 부흥 운동을 일으킵니다. 송도(개성)와 서울의 감리교 사경회를 필두로 1903년 원산의 기도회와 사경회가 이어지면서 바야흐로 조선 교회에 죄를 고백하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부흥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암울한 현실, 그 고난과 절망을 신앙으로 이겨내고 희망의 역사를 일구려는 몸부림이 신앙 부흥 운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죄의 고백과 회개로 시작된 조선 부흥

1903년과 1904년 원산을 뜨겁게 달구었던 부흥 운동의 불길은 이내 송도, 서울, 평양, 제물포와 강화 등지로 퍼져갔고, 곳곳에서 “며칠 동안 날마다 하루 두세 번씩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죄를 자백하는”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1905년에 이르러 부흥 운동은 감리교를 벗어나 장로교와 신학교로까지 확산되었고, 이에 힙 입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전국에서 일제히 부흥 집회를 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 결의에 따라 1906년에 서울과 평양, 송도, 원산, 부산, 대구, 목포 등 나라 곳곳에서 대규모의 부흥회가 열렸고, 이 부흥의 불길이 마침내 1907년 ‘평양 대부흥’으로 폭발하여 다시 온 나라를 달구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까지 번져갔습니다.
이 부흥 운동을 통하여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죄를 통렬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장로는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재산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하였고, 심지어 어느 여인은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인 죄를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부흥 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거짓말·미움·시기·근친상간과 같이 양심과 인륜에 어긋나는 죄는 물론이고 살인·강도·강간과 같이 사회규범을 어긴 죄, 술주정·도박·축첩과 같이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죄까지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였습니다. 평양 숭실학교에서 학생들의 회개 장면을 목격한 애니 베어드가 “마치 지옥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장대현교회의 부흥 현장을 지켜본 그레함 리 선교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그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자기가 죄인이라는 완전한 고통 속에서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때때로 회개의 고백 후에 모든 회중이 통성기도를 했다.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고,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 3·1운동으로 이어져

이렇듯 조선의 부흥 운동은 철저한 회개와 죄의 고백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용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갈구하는 기도가 뒤따랐고, 마침내 용서의 체험에 더하여 더욱 거룩한 삶을 결단하였습니다. 하여, 회개와 중생을 체험한 조선 기독교인들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죄의 고백이 행동으로 옮아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윤승근의 양심전(良心錢) 이야기입니다.
1903년 원산에서 열린 첫 부흥 집회에 참석했던 윤승근은 20년 전에 주전소(鑄錢所)에서 일할 때 정해진 봉급보다 많은 돈을 받고도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던 일이 떠오르자 그것을 되돌려주려고 주전소를 찾아갑니다. 주전소가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탁지부(度支部)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돈을 건넸고, 그러자 탁지부에서는 윤승근이 가져온 돈을 ‘양심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훔쳤거나 횡령했던 돈이나 물건을 되돌려주는 운동이 이곳 저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금껏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행동 가운데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것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일어났습니다. 예컨대 충남 홍성에 있는 한다리교회의 한 교인은 “성령을 받은 후 죄를 깨닫고” 10년 동안 데리고 살던 첩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첩을 서울로 보내 간호사 공부를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종을 풀어주는 일도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봉건 사회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축첩(蓄妾)과 노비이지만,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첩을 내보내고 노비를 풀어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 부흥은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죄와 의’를 깊이 깨우치고 그에 대한 감수성을 키움으로써 내면과 행위, 개인의 일상과 사회·역사를 통틀어 성결한 삶을 살도록 추동하였습니다.
암울했던 역사 현실을 뚫고 타오른 부흥의 불길은 조선의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품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조선 교회를 의를 추구하는 성도(聖徒)들의 응집력 있는 공동체로 빚어갔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한 성령을 체험하고, 거룩한 삶을 결단하였던 부흥의 사건은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서 불의에 맞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도록 세웠으며, 이 물결은 마침내 조선 역사에 길이 남을 3·1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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