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필 때 나는 소리가 있습니다.
“와!”하는 소리. 탄성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벚꽃이 질 때 들려오는 탄성은 더합니다. 그렇게 벚꽃 꽃잎은 세상으로부터 화려한 배웅을 받으며 축제처럼 집니다.
다음은 꽃대가 질 차례입니다. 그러나 꽃대를 배웅할 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무심함 같은 고요함에 꽃대는 신속히 집니다. 그렇게 꽃대는 바닥을 뒹굴다 사라져갑니다.

아름다운 꽃대의 마음

그런 꽃대에게 물었지요.
“꽃대야, 꽃대야, 너의 이름에도 ‘꽃’이 있구나.
너는 예쁘기 보다는 참 아름답구나.
네가 고이 받들던 꽃잎은 열광의 세레모니 속에 찬란하게 졌는데….
네가 질 때에는…. 네 마음은 어떠니?”
“행복해요! 행복해요! 정말 행복해요!
제가 할 일을 다 할 수 있어서요.
제가 부르는 노래를 못 들으셨나요?
떨어져 있는 지금도 부르고 있는데.
저 보다 더 소중한 저의 사랑 꽃잎이 열광을 받을 때,
저는 얼마나 신나고 행복했는지 몰라요.
제가 받는 열광은요, 다름이 아니라
저의 사랑 꽃잎의 행복에 달려 있어요.
제 관심은요, 오로지 꽃잎의 안위에 있어요.
세상이 저에게 무심했나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
꽃대는 자기의 입장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꽃잎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꽃, 나는 그분의 꽃대

주님은 나의 꽃, 나는 주님의 꽃대라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사랑하는 것쯤은 할 수 있겠다며 찬양 사역이라는 옷을 입고 오늘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게 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속이는 발람은 아닌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발람의 길이기 때문이지요. 꽃대는 꽃잎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의 처지에 아랑곳없이 감사와 기쁨이 전부였습니다. 꽃대의 삶은 한마디로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꽃대와는 달랐습니다. 정말 꽃대처럼 주님께 눈이 멀었다면 아픔을 감지할 여력도 없었겠지요. 저는 자주 마음이 상했고, 자주 넘어졌고, 자주 이웃이 멀게 느껴졌습니다.
‘뭐, 인생인데, 사람인데….’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 데 선수였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주 마음이 상했던 것은 많은 편견 때문이었고, 자주 넘어졌던 것은 주님을 진정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웃이 자주 멀게 느껴졌던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꽃대가 들려 준 말에 저는 한 단어 앞에 심판처럼 서게 되었습니다.
가식. 가장 가까이에서 배신하는 것. 원수보다 더 무서운 것.
올해 봄 저는 꽃 한 송이가 보여 주는 천국과 지옥을 보았습니다. 어느새 제 노래가 발람이 부르는 가식적인 사랑의 노래가 아닌가 하는 불편한 진실 앞에 세워지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제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의 강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행복해 하면서 말이지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찬양이 터져 나오고 자신을 알면 알수록 회개가 터져 나온다고 하지요. 사랑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사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숨이, 우리의 음이, 우리의 꿈이 한결같이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어지길 갈망합니다. 끝으로 꽃대의 말을 빌려 이 시대의 사역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은 어떠세요?”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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