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국교회사 이야기 ⑨

조선 에서 기독교는 ‘들불(wildfire)’마냥 빠르게 퍼져갔습니다. 두 손을 뻗어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절망스런 시대 상황, 그 절망을 돌파하여 나라와 백성의 됨됨이를 바로 세우려는 조선의 ‘처음 기독인’들의 노력과 희생이 빚은 결실이었습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낯선 이국땅, 여전히 반(反)서양과 척사(斥邪)의 기류가 짓누르는 조선에 와서 이곳 사람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목숨 걸고’ 복음의 씨를 뿌렸던 선교사들의 헌신 또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 사람, 매켄지(William J. Mckenzie)와 헐버트(Homer B. Hulbert)를 살펴봅니다.

소래주민들의 친구, 매켄지

매켄지는 1893년 12월, ‘현지에 도착하여 노동을 하든지, 직업을 찾든지, 그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겠다’며 교단이나 선교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은 채 독립 선교사로 조선에 옵니다. 그는 조선에서 처음 교회를 세운 곳, 황해도 장연에 있는 소래마을로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함께',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사실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와서 그것도 서울 같은 대처가 아니라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입니다. 서양 사람이나 기독교에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고, 게다가 몸에 맞지 않는 음식에 열악한 주거 환경, 온갖 풍토병의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어느 선교사의 기록을 보자면, 조선 사람과 비슷하게 산다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매켄지는 “조선 사람에게 전도하려면 조선 사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소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서울에 있는 여느 선교사들과 달리 초가지붕 토담집에서, 동료 선교사들의 지원도 마다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그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 그대로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매켄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소래 교인들은 물론이고 불신자들까지 그를 무척 신망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황해도 여기저기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매켄지는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선 주민과 농민군, 관군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을 정도였습니다. 그 뒤 소래 교인들과 함께 직접 나무와 흙을 나르며 예배당을 짓던 매켄지는 봉헌식을 며칠 앞둔 1895년 7월 23일, 일사병과 신열로 인한 정신이상으로 서른네 살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떠납니다. 조선에 온지 559일, 소래마을에 정착한지 313일만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소래 교인과 이웃사람뿐 아니라 멀리 그의 고향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여 마침내 캐나다 장로교회의 조선 선교를 불러왔습니다.

헐버트, 조선의 현실 함께 아파해

헐버트는 1886년 7월,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초빙되어 조선에 온 뒤로 교육뿐 아니라 언론·출판·선교의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한글과 영어, 한문으로 두루두루 많이 썼습니다. 조선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집필하였고, 서재필을 도와 ‘독립신문’에도 참여하였으며, 전통 민요 ‘아리랑’을 악보로 만들어 보급하였습니다.
일제 침략이 두드러질 즈음에는 조선의 자주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토지 수탈을 비롯한 일제 만행을 영문 잡지를 통해 전 세계에 고발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의 정부 요인들과 접촉하며 조선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고, 1907년에는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의 방해로 조선 특사들의 본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알고 지내던 유력한 언론인을 통해 조선 특사가 국제 여론에 호소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자신 또한 가는 곳마다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비판하였습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서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미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순회강연을 벌였고, 1909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YMCA와 상동청년회에서 강연을 이어갔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헌신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선교사들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면 선교사뿐 아니라 모든 성서,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을 이 나라에서 쫓아내야 한다”며 꿋꿋이 맞서 결코 조선의 현실에 눈감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식민지에서 선교는 곧 불의한 침략 세력을 물리치고 독립과 정의를 일구는 데 있다고 믿은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헐버트는 대다수 선교사들이 때로는 마지못해, 때로는 적극으로 일제 침략 정책에 동조하는 분위기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 사람의 편에서 조선 사람을 위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일제에 맞서다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되고 말지만, 조선 독립을 위한 그의 노력은 글과 연설, 한인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뼛속까지’ 조선과 조선 사람을 사랑한 그는 1949년 7월, 마침내 사랑해 마지않던 조선 땅을 다시 찾았고, 바로 그 조선에서 숨을 거두고, 그의 바람대로 조선 땅에 묻혔습니다.
‘모든 것 바깥에,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기대어 자신이 터한 삶의 바탕을 넘어서고자 했던 이들, 고향을 등지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들, 조선의 현실을 아파하고 조선 사람들과 더불어 조선의 역사를 일구며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고자 애썼던 선교사들의 헌신은 고스란히 조선 기독교의 됨됨이를 올곧게 지켜가는 밑거름이 되어주었습니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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