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대 선교사 이야기 ⑧ ‘마리엘라 탈마지 프로보스트’ 선교사

▲ 마리엘라 선교사

<지난호에 이어 계속> 그녀의 아버지 탈마지(한국명 ‘타마자’) 선교사는 집에서 전도하러 나갈 땐 신발끈도 제대로 묶지 않고 뛰어나갔다고 한다. 복음을 전하러 갈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신발끈조차 신경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탈마지 선교사는 1910년 한국에 입국해서 7남매를 낳았다. 선교사들이 쫓겨날 때도 가장 오랫동안 버티다 결국 일본인에 의해 1941년 강제 추방을 당한 선교사였다.

3대로 이어진 한국사랑

그는 광주지역을 거점으로 초기에는 농촌사역과 교회사역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센터책임자로 일하면서 사역했다. 한국에 올 때 외동딸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함께 한국에 왔다. 1910년 당시의 조선의 위생을 생각하면 안 오는 것이 더 좋은 시절이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외할머니는 혼자 미국에 남는 것 보다 딸과 함께 한국에 와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7명의 손자 손녀를 길렀고, 선교사 자녀들과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17년 동안 탈마지 선교사 부부를 도왔다. 덕분에 부모님은 전라도 지방을 다니며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었다. 현재 그녀의 외할머니(에머슨 여사)는 광주의 호남신학교에 묻혀 있다.
그녀의 가족 중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사람은 3명이다. 그녀의 둘째 오빠 타요한 선교사는 한남대학교 초기 총장을 역임하며 한국의 교육에 공헌하고, 그녀의 언니 역시 1948년부터 간호사로 전주예수병원에서 일했다. 그 때 간호학교를 세운 언니 케티는 그곳에서 의료 선교사 계일락(Dr. Frank G. Keller)과 결혼 하여 지속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계일락 선교사는 7대 병원장을 하다 소천, 한국에 묻혔다. 계일락 선교사의 묘소는 전주예수병원 건너편에 있다.

▲ 틈날때마다 다른이들에게 선물할 소품을 만드는 마리엘라 선교사. 그녀의 손길에 그의 마음이 전해지는듯하다.

눈 먼 친구의 신학공부 도와

마리엘라 역시 1948년 간호사로 전주예수병원에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난민과 고아,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노력했다. 전쟁중에도 병원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일했던 그녀는 그 때 종군기자로 온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 프로보스터(한국이름은 ‘부례문’)는 원래 연희학교에서 영어와 성경, 화학을 가르치는 교육 선교사였다. 결혼 후 그들은 대구와 경주를 오가며 난민 고아원 사역을 했다.
그 즈음 경동 노회로부터 부탁을 받는다. 경주에 기독교 학교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부부는 미국의 많은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받아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남편과 마리엘라 할머니는 65년 은퇴한 후에도 계속 장학금을 지급, 학생들이 하나님을 알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남편 부례문 선교사의 한국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한국과 경주를 방문, 문화학교가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후원을 했다. 암투병 중이던 말년에도 학교를 찾았던 그는 결국 문화학교 뒷동산에 이장되었다.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두 부부가 해온 많은 사역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했던 그들의 태도였다. 박갑용이라는 그들의 친구가 있다. 어릴 적 눈이 멀어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이 친구를 위해 부부는 사람을 붙여주어 신학공부를 할 수 있게 했고, 목사가 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결혼한 친구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스웨터 짜는 기계를 선물한 것도 그들 부부였다. 그들의 사람에 대한 배려와 도움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려주는 지표가 되었다.

한병선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로 한국의 3세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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