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특집 | 영화 ‘왕중왕’ (King of Kings)

니콜라스 레이의 오래된 영화 ‘왕중왕’(1961)은 참 친절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해설자가 틈틈이 배경과 상황을 설명해주고, 오페라처럼 서곡과 마침곡이 있을 뿐 아니라, 긴 러닝타임을 염려해한 나머지 간주와 막간(intermission)까지 두었다(덕분에 러닝타임은 더 길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듯한 모양새다. 그런데 어쩌면 레이가 옳을지도 모른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이야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이고 그의 가르침일거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는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사에 수많은 ‘예수 영화’들이 있었으나, ‘왕중왕’이 특별히 흥미로운 건 초반부터 줄곧 바라바를 중요한 인물로 내세운다는 점 때문이다. ‘왕중왕’에서 바라바는 군사력으로 로마에 맞서기를 주장하며 거대한 지하 반군을 이끄는 지도자로 등장한다. 사실 이러한 설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다. 강도로 번역된 헬라어 ‘레스테스’는 원래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는 자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아가페 성경사전’).

예수와 바라바의 대조로

반면, 예수는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는 쪽이다. 제자도의 급진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파졸리니(‘마태복음’(1964))와 같은 감독에게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너희가 나로 인해 핍박받고 세상과 불화할 것이다”는 메시지가 중요했다면, 레이에게 가장 중요한 예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같은 구절이다.
가룟 유다는 정확히 이 둘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로마 장교 루시우스가 있다. 영화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바라바와 예수가 동등한 위치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이러한 대립은 단지 흥미로운 갈등 구도를 만들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예컨대 루시우스는 바라바를 풀어주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한다. “너(바라바)와 예수는 다르다. 그가 왕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왕중왕’이 바라바를 이처럼 부각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바라바의 존재는 영화에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왕중왕’에 따르면, 빌라도가 바라바와 예수를 놓고 백성들에게 선택하도록 한 점은 그가 단지 책임을 회피하거나 예수를 풀어주려고 구실을 만든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바라바와 예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빌라도의 정치적 계책에 가깝다. 혹 군사력을 지닌 바라바 일당과 당장 폭력적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왕이라 주장하는 예수의 세력이 결합할 경우, 그들은 로마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 아닌 폭력 선택한 백성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라바와 관련하여 이 영화가 던지는 의미 있는 질문들이다. 빌라도 편에서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면, 이는 군중의 편에서도 동일하게 그저 예수가 싫어서 “차라리”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답하고 마는 문제가 아니었다. 초반부터 예수와 바라바를 대립구도로 내세우면서 영화가 분명히 하는 것은 “바라바를 살려라!!” 했던 유대 백성들의 외침은 곧 폭력에 대한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선택이었다는 관점이다. 요컨대 그것은 ‘두 죄수’인 예수와 바라바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평화와 전쟁, 또는 용서와 복수 사이의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외침(“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그대로, 그들은 잔혹한 폭력의 결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는 또한 바라바가 예수의 집회 현장에, 재판과 처형의 현장에 늘 와 있었던 것, 즉 그 역시 군중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줄곧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때문에 살아난”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이로써 바라바는 그의 죽음을 ‘대신 죽음(대속)’으로 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대표단수가 된다. 의지와 본성으로는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으나 얼떨결에, 혹은 극적으로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된 자. 그것이 구원과 관련한 그리스도인의 정체‘identity’ 아니던가. 니콜라스 레이의 친절한 영화 ‘왕중왕’은 때로는 바라바가 되어, 때로는 그를 선택한 군중이나 가룟 유다가, 때로는 루시우스가 되어 안팎으로 이 점을 되새기게 한다.
자. 군중은 흩어졌고,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었으며, 루시우스는 신앙을 고백했다. ‘운 좋은’ 바라바는 주요한 사건의 현장마다 내내 예수 곁을 맴돌았지만, 정작 부활의 현장에서는 배제된 채 유다의 시신 옆에 참람하게 주저앉아 있다.
바라바는,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 세상으로 떠난 제자들이 남긴 그물과 부활한 예수의 그림자가 만나 만들어낸 선명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묻는다.


최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하는 삶을 꿈꾸는 그리스도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중앙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 ‘영화와 사회’(공저), ‘알고 누리는 영상문화’(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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