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기를 맞았건만, 20세기 조선의 시대 상황은 어둡기만 합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기세등등하게 조선으로 몰려오지만, 조선의 지배자들은 나라를 이끌 철학도, 나라를 지킬 힘도 없었습니다. 하여, 겨레를 지키고 올곧게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참담한 마음을 달래며 여기저기서 뜻을 모을 때, 기독교는 ‘겨레의 종교’로 더욱 뚜렷이 떠올랐습니다.

항일 민족운동의 터전으로

나라 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즈음, 기독교는 다양한 사회 운동을 벌이는 한편 기도회와 사경회를 통하여 항일 민족운동의 터전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상동교회 청년회는 을사조약(1905년)에 반대하는 ‘구국 기도회’를 열어, “나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의 독립국”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한 주 내내 수천 명의 교인과 청년들이 참여하였고, 그 열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기도회를 마친 청년들이 도끼를 메고 대안문 앞에 나가 을사조약의 무효를 요구하는 ‘상소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구국 기도회는 그 뒤로도 서울과 지방에서, 교회별로 혹은 교회 연합으로, 그리고 기독교 학교와 청년 단체에서 쭉 이어져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성서를 통해 조선의 현실을 읽어내고 해방의 소망을 키웠습니다. 주일학교 교본(1907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악과 그 세력을 알게 된 것처럼 지금 조선 사람들이 악의 본질을 깨우쳐 가기 시작했다”고 쓴 데서 드러나듯이, 그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켜 애굽을 탈출케 하신 성서의 역사에서 겨레의 희망을 찾았습니다. 강력한 골리앗을 물리친 어린 다윗에게서 조선 사람의 앞날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앙 부흥 운동을 통해 교회를 응집력 있는 공동체로 일구어 갔습니다.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밤새 성경을 공부하고,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하나의 신앙, 하나의 민족 정서를 체험하였습니다. 이렇듯 교회는 해방의 소망을 북돋우는 신앙의 공동체이자 겨레의 공동체로 자리잡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조선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1905년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大韓) 나라 안에 예수교의 신도가 수십만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저마다 ‘죽을 사(死)’자로 스스로 맹세하여 국가의 독립을 잃지 않기로 하늘에 기도하고, 동포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그런즉 이것은 대한의 독립에 있어서 근본 바탕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 민족의 앞날을 아예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이릅니다. 나라를 염려하던 선각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구주 예수를 믿어라”고 권고할 정도입니다. 1908년 3월, 『대한매일신보』의 한 대목입니다.
“원컨대 동포들은 다 구주를 독실하게 믿어 한 몸의 죄와 한 나라의 죄를 속량하고 주의 은혜를 감복하여 몸이 죽더라도 어진 사업을 이루며 창생들도 구제할지어다. … 상제로 대주재를 삼고 기독으로 대원수를 삼고 성신으로 검을 삼고 믿음으로 방패를 삼아 용맹 있게 앞으로 나아가면 누가 죄를 자복치 아니하며 누가 명을 순종치 아니하리오. … 우리 동포들도 이것을(영‧미국) 부러워하거든 그 나라들이 승봉하는 종교를 좇을지니라.”

해방의 소망을 키우다

일 제 식민 통치가 시작되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민족의 희망을 찾았습니다. 기독교의 가치, 곧 사랑과 정의,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열정에서 겨레가 가야할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인간 해방을 위한 운동”이고 “조선독립의 어머니”였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이미 20만 신도와 2천개 가까운 집회소, 27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2,300여명의 조선인 교역자, 800개가 넘는 학교와 수많은 병원과 고아원을 경영하는 조선 민족 최대의 공동체였습니다.
몇 사람만 모여도 감시받던 시절에 교회는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삼일기도회, 철야 기도회는 물론이고 연합 부흥회와 사경회까지 열 수 있었고, 이곳에서 ‘출애굽’의 소망을 나누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과 열정, 조직을 두루 갖춘 기독교가 민족 독립의 바탕이자 보호막 구실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교회를 바탕으로 전덕기, 손정도, 이동휘, 이동녕, 김구, 안창호, 김규식 같은 걸출한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숱한 해방운동이 펼쳐졌습니다.
기독교에 거는 조선 사람들의 기대가 치솟고 기독교인들의 항일 움직임이 많아지는 만큼 일제의 감시와 탄압 또한 거세졌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학교의 교육 내용을 하나하나 검열하였고, 교회 모임을 감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 관하여 설교했다는 이유로’ 목사를 붙잡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구실을 들이대며 100명이 넘는 기독교인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구속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105인 사건).
그러나 출애굽의 소망을 품은 이들, 종말을 내다보며 재림을 기다리는 이들의 뜻을 꺾지는 못하였습니다. 민족사의 암흑기를 맞아 기독교는 겨레의 고난을 함께 지고 자유와 해방의 걸음걸이를 이어갔고, 겨레는 그런 기독교를 자랑하고 거기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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