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엘라 탈마지 프로보스트' 선교사

우리는 플로리다에서 헌틀리부부(한국명 ‘허철선’. 광주에서 사역)와 인터뷰를 마치고 불랙 마운틴에 있는 남장로회 선교사 은퇴촌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사역하신 10여명의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선교사님들과 우리 사이에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조율해준 마리엘라 선교사님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마리엘라 탈마지 프로보스트
(Mariella Talmage Provost) 선교사

이곳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그녀는 탈마지(Talmage, John Van Neste 한국명 ‘타마자’) 선교사의 막내 딸이자 프로보스트(Raymond Provost, 한국명 ‘부례문’) 선교사의 아내였다. 그녀는 한국에서 선교사 자녀(Missionary Kids)로 태어나 한국에 살다 일본에 의해 추방되었다. 미국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해방 후 한국에 와서 전주에서 간호사로 일할 무렵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난 한국에 다시 와 남편과 함께 경주 문화학교를 정비하여 많은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가 바로 마리엘라 탈마지 프로보스트(Mariella Talmage Provost 한국이름은 ‘부 마리아’) 선교사다.
탈마지 선교사는 1923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90세 가까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하고 그 기억력이 뛰어나 우리를 놀라게 했다.

선교의 시작은 근검절약

나는 마리엘라 할머니 댁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할머니께서는 자고 가라고 하시면서 옷도 주고 이불도 주셨다. 그리고 자신이 뜬 작은 목도리를 선물로 주시고 주방에서 쓰는 행주도 주셨다.  그녀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이분이 뼈 속까지 선교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근검절약’ 그 자체였다. 시간을 아끼는 것(평균 10분내지 15분정도 단촐하게 식사한다)과 모든 물건을 필요한 만큼만 사는 것 등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다.
할머니는 원 베드룸(방 하나에 거실, 부엌이 있는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었다. 왜 이곳에서 사느냐고 물으니 본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큰 침대가 있고 서재가 있어서 컴퓨터나 자료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그녀는 매일 컴퓨터를 하고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펼쳐놓기가 좀 복잡했다. 수많은 자료와 테잎이 있었는데 아직 디지털 작업이 안 된 것이었다), 손님이 오면 손님방도 내줄 수 있는 그런 곳에 살고 싶지만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하셨다.
자신은 그렇게 사는 것보다 이렇게 작은 집에 살면서 절약한 돈을 선교지로 후원금 보내는 게 더 행복하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절약 정신은 굉장히 투철했다. 은퇴촌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이용하면 편하지만 이용 횟수에 따라 돈을 내야 하기에 자신은 일주일에 2회만 이용한다고 했다. 그녀의 전화는 그 지역에서만 사용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 지역은 전화를 주로 받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이 지역에서만 전화를 해서 전화 기본요금을 적게 내는 프로그램에 가입되어 있었다.


끝나지 않는 선교사의 삶

할머니는 자기 차도 손자에게 주고 자신은 마을 내에만 다닐 수 있는 전기차를 타고 계셨다. 그 전기 차는 전기 충전만 하면 되는데, 그냥 차를 타면 보험료와 기름 값으로 한 달에 100달러나 드니, 그 돈도 모아서 역시 선교지인 말라위로 보낸다고 했다. 차가 필요하면 근처에 있는 린튼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같이 다니면 된다고…. 조금 불편해도 돈을 모아 선교지에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을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선교사의 삶이구나’ 생각했다. 선교에서 은퇴하는 것이 아닌 일상으로 이어져 평생 선교사로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선교사의 삶인 것이다.
이분은 평생 그렇게 선교사로 살아오셨다. 한국에 있으면서도 미국을 방문해 많은 분들로부터 헌금을 모았다. “당신이 5달러를 내면 한국에서는 한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전쟁통의 고아와 학생들을 그렇게 헌금을 모아서 도왔다.
지금껏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선교를 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에게 어떤 곳이든 초대요청이 오면 자신에게 줄 경비를 선교지에 보내라고 한다. 자신은 어딜 가든, 안가든 상관없지만 그 돈이면 그 선교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도움 받을 수 있다고…. 요즘 그녀의 선교지는 말라위다. <계속>

한병선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로 한국의 3세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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