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에 찌든 나라, 신분과 성별로 칸막이를 치고 차별을 일삼던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라와 백성의 됨됨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조선 사람, 특히 변두리에 밀쳐진 힘없는 이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글’을 얻었습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되돌려 받았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녔다는 자존감을 되찾았습니다.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쓰며 새삼 ‘한’ 겨레임을 느낄 수 있었고, 생각과 뜻을 나누는 소통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을 ‘한글’로 옮기면서 비롯되었습니다. 한글로 쓰인 복음이 조선 사회의 소통 체계를 뿌리로부터 흔들어 그 문화와 체질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본디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감동한 이들은 대개 ‘말씀’의 보고인 성경을 제 나라 말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서북지방의 젊은이들도, 개화 지식인 이수정도 우리 글로 성경을 옮겼습니다. 뒤이어 조선에 온 선교사들도 성경 번역에 힘을 쏟았고, 마침내 1900년에는 신약성경이, 1910년에는 구약성경이 모두 우리 글로 옮겨져 1911년에 한 권으로 된 ‘성경전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암글’이니 ‘여자들의 글자’니 하면서 천대받고 있던 ‘한글’로 성경을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모든 문서 사업에는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 모두 한글을 사용”한다는 원칙까지 정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나라 사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로 성경을 옮겨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존엄하게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맞고, ‘오직 말씀, 오직 성경’에 터하려는 종교개혁의 정신에도 잇닿는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여, “글자 수가 많고 획법이 매우 까다로워” 배우기가 어려운, 그래서 특권층의 글자일 수밖에 없는 한자가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우리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워 모든 학문을 설명하기에 쉬운” 바로 그 한글로 ‘거룩한 말씀’을 옮겼습니다.

‘말씀’이 ‘한글’을 입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조선에서 한자는 그냥 ‘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중화사상의 표상이며 유교 질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거룩한’ 문자였던 것입니다. 하층의 백성들로부터 양반 사대부를 구별 짓는 ‘문화 자본’이며,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무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자를 거부하는 것은 중화 질서와 유교 체제, 곧 현존 질서를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의 기독교는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옮겼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눅1:52) 하나님의 뜻에 기대어 그릇된 질서에 맞섰던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중국에서 50년에 걸쳐 보급한 양을 10년 안에 보급”했을 만치 빠르게 조선 땅 이곳저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국어 강습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성교서회’를 만들어 한글로 된 책을 펴냈고, ‘조선그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을 한글로 제작하여 펴냄으로써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주도로 한글 전용의 ‘독립신문’과 ‘매일신문’도 나왔습니다. 이로써 한글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언어로,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소통의 매체로 올라섰습니다. 오랜동안 짓밟혀온 나라 글이 ‘복음’을 통해 되살아나 마침내 제 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춘원 이광수는 “귀중한 신‧구약과 찬송가가 한글로 번역되니 비로소 한글의 권위가 생기고 또 보급된 것”이라며,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기독교회”라고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의 한글 사랑은 아주 철저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독립신문’은 “존귀한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써서 나라 사람을 “동물”로 만들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았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만일 “조선 사람들이 계속 한자로 소통한다면 나라 독립의 생각은 아예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말입니다. 이는 한글을 사용하는 뜻이 다만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편의성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에는 신분과 성별 따위로 사람을 나누어 차별을 일삼는 그릇된 됨됨이를 바꾸고, 소통의 혁명을 통해 평등한 민족 공동체를 이루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기독교가 나서서 한글 중심의 소통 문화를 만들자 조선의 문화와 체질이 변화합니다. 바야흐로 조선은 중화주의의 묵은 때를 벗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닌 민족으로 거듭났습니다. 조선 사람은 글로써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얻었습니다. ‘말씀’이 ‘한글’을 입고 조선 땅 곳곳으로 퍼지면서 마침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다 펴지 못하던” 조선 사람들이 자기 뜻을 펴고 이웃과 더불어 생각을 나누는 삶의 주체로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나라와 백성의 됨됨이를 바꾸어갑니다.

 

박규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이며 목회자다. 그리스도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본래의 교회, 말씀에 터한 생명의 교회”를 꿈꾸며 목회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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