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은 사순절, 참회의 절기입니다. 그 절기의 끝에는 수난주간이 있습니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에 버성겨 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뉘우치는 시기입니다. 뉘우침은 잘못이 있으니까 하는 것이고, 그 잘못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길,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 곧 배신입니다.

 

 

제자들의 배신

스승이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를 함께 합니다. 빵을 나누면서 스승이 말씀합니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넘겨준다는 말은 스승을 잡아 죽이려는 자들에게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스승을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배신자’ 유다가 스승에게 말합니다. ‘저는 아니지요?’ 배신도 참 뻔뻔스러운 배신입니다.

자리를 옮긴 뒤에 스승이 유다를 뺀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수제자 베드로가 울컥(?)해서 나섭니다. ‘설령 모든 사람이 다 스승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참 장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슬프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하는데, 베드로야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수제자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더 강경하게 말합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는 ‘죽음’을 말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목숨을 건다는 것, 그것은 최고의 일이고 최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스승이 붙잡히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열혈 제자 베드로도 그날 밤, 날이 밝기 전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다 스승을 배신했고, 수제자는 더 크게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그 배신의 끝자락에서 홀로 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합니다.

 

 

삶, 배신의 연속

처음교회는 그 배신을 뼈아프게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네 복음서는 빠짐없이 그 사실을 전해줍니다. 이미 초기 교회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그 권위가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신을 강렬하게 전해주는 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그리고 사도와 신자들에게 그 배신이 너무나 뼈아팠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배신은 그날 밤의 배신입니까? 아닙니다. 그날 밤의 배신은 극단적으로 드러난 배신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다른 제자들도 스승과 함께 동행했지만, 결코 온전히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말을 들었지만 끝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스승을 따라가면서도 스승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스승이 꿈꾸는 바와 다른 것을 꿈꾸었습니다. 스승은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려했지만, 제자들은 높아지기를 바랐습니다. 스승은 ‘패배’를 향하여 가고, 제자들은 ‘승리’를 향하여 갔습니다. 배신은 이미 그들의 삶에 크게 자리를 깔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배신의 연속입니다. 스스로의 소망에 배신하고, 주위의 믿음에 배신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배신합니다. 이 말을 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어찌 없겠습니까. 자신과도 그런데 주위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배신과의 직면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의 한 쪽에는 배신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우리 삶의 길에 배신도 ‘동행’합니다.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사람일수록 배신의 위험도 클지 모릅니다. 햇살이 눈부시면 그림자도 짙어지듯이! 스승에 대한 베드로의 열정이 뜨거웠던 만큼 그의 배신도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베드로는 그 배신으로 해서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삶은 결코 선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삶은 악으로도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기 전에 먼저 할 일은 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배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추락을 이야기합니다. 이름, 직함 대면 알 만한 교계 지도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2012년의 한국 교회 문제의 해법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난마처럼 얽힌 이 위기를 넘어설 계기가 있겠는가를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도 희망적인 답을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를 높이 치켜드는 만큼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와 적대적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가 늘어가는 만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고통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입니다. 배신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합니다. 그래서 배신은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입니다. 한국 교회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저부터 배신입니다.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희망은 아름다운 것을 말하는 데에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희망은 내 속에, 우리 속에 스멀거리며 피어나는 배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참회의 절기는 배신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절기 내내 제 속에 숨어 있는 배신에서 눈을 떼지 않아 볼 참입니다.

서진한(대한기독교서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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