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쓴 것 중 가장 압권은 초기 기독교의 상황과 선교사 이야기를 쓴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란 책이다. 책의 분량이 900쪽도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지만, 우리가 몰랐던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나 조선 말기 왕실의 상황과 선교사들의 이야기 등이 매우 새로웠다. 내가 미처 몰랐던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런지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 책은 10년간의 자료 수집과 15년간의 집필을 통해 나온 아주 귀하고 소중한 책이다.

헌틀리 선교사 부부
오늘은 그 책을 쓴 헌틀리 선교사 부부를 인터뷰하러 왔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호남신학교의 차종순 총장님이 이 부부를 가장 많이 추천하셨다. 잘 정리된 역사적 자료를 많이 가지고 계시고, 인간적으로도 좋은 분들이라고 하셨다.
헌틀리 선교사 부부는 1965년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분들은 한국에 도착한 첫 주부터 월요일 미세스 헌틀리 영어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연세어학당을 다니며 학생들이나 영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며 성경 공부를 하는 사역이었다. 이 사역은 한국을 떠나는 1985년까지 20년간 계속되었다.
그녀의 월요 성경 공부 모임에 나왔던 한국 학생 중 한 명이 나중에 LA 근방 슬럼가에서 ‘미세스 헌틀리 월요 영어 성경 공부’를 자비를 들여 어려운 아이들에게 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헌틀리 부부는 사역의 중심은 ‘일’이 아닌 ‘관계’라고 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들의 삶이 변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사역했다고 한다.
연세어학당에 다니면서 가장 기억나는 사람은 엿을 파는 한씨 아저씨라고 했다. 그는 아주 어렵게 살면서 막내아들을 연세대에 보내 놓고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데 어느 날 그분이 갑자기 안 보여서 알아보니 아파서 나올 수 없었다고…. 헌틀리 부부는 그에게 약과 함께 쌀을 보냈다. 그것을 받은 한씨는 이렇게 어렵게 사는 동안 한국인 누구 한 명도 자기를 도와준 적이 없는데 외국인이 자신을 도와준 것에 감동해 온 가족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에 대한 작은 관심은 헌틀리 부부에게 있어 사역의 중심이 되었다.

포탄속에서 살아남다
헌틀리 부부는 순천을 거쳐 광주에 정착했다. 남편은 학교에서 독일어와 목회 상담학을 가르치고 병원에서도 목사로 사역했다. 부인은 매주 월요일 성경 공부 모임을 이끌었다. 그들은 광주에서도 많은 분들에게 좋은 정보를 주고 돌봤는데 그 중 가장 먼저 한 것이 입양이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영양실조에 걸려 몸은 비쩍 마르고 배만 튀어나온 한 아이를 입양했다.
그냥 두면 이 아이는 한 달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였다. 부부는 기도하고 이 아이를 입양했다. 그 아이는 지금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청년이 된 마이클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집에는 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살았었다. 집이 없는 아이들,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 그 외에도 당장 급한 사람들이 머무르며 삶을 나누었다. 플로리다에 살고 있는 현재도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이들 집에 머물고 있었다.
헌틀리 부부의 도움이 가장 많이 드러난 것은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였다. 헌틀리 부부는 광주의 비참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광주에 있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당시의 상황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해외 기자들은 그들의 집에 몰려들었고 그 후 15개월간 각 매체에 인터뷰 자료를 보내고 광주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이들 집에서 기숙했고 그러다 보니 20여 명의 사람들이 늘 그 집에 머물렀다.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헌틀리 부부에게도 잊지 못할 슬픔이다. 그들이 가르쳤던 학생들의 죽음과 수많은 죄 없는 목숨들이 죽어 가는 것을 봐야 했다. 마지막엔 광주에 포탄이 터질 거란 루머마저 돌았다. 그들은 광주를 빠져나갈 기회를 얻었지만 갈 수 없었다. 그들의 삶과 사역이 있어야 할 곳은 광주였고, 결국 포탄 속에서 그들은 살아났다.
지금은 선교지에서 은퇴했지만 이들 부부의 삶은 여전히 활기차 보였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가르치고, 돕고, 집에 아이들을 불러다 함께 살고…. 사역에서는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는 그분들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나는 나중에 후배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화려했던 과거를 자랑하지만 현재는 아무런 열매가 없는 그런 삶을 보여 줄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현재에서 사역을 이어 가는 섬김의 삶을 보여 줄 것인가? 우리가 사는 지금을 언젠가 역사는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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