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덕, 그녀가 다시 태어났다
기독교가 퍼지면서 조선 땅 곳곳에 변화의 물결이 일렁입니다. 유교 질서의 밑바닥에서 움츠리며 살아야 했던 이들이 복음에 힘입어 어깨를 펴고, 떳떳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성입니다. 칠거지악이니 삼종지도니 하면서 여성을 아무런 능력도, 권리도 없는 한낱 미물마냥 취급하는 유교 조선. 그곳에서 매양 짓눌리며 살아온 조선의 여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복음에 기대어 ‘존엄한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 본보기가 전삼덕(全三德)입니다.

전삼덕은 평안도 강서군의 양반집 딸로 태어나(1843년) 열일곱 나이에 이웃마을 양반 자제와 혼인을 합니다. 벼슬살이하는 남편을 따라 여기저기 떠돌다가 남편이 관직을 사임하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남편이 첩을 들이는 바람에 더더욱 소외감에 빠져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입교를 허락한다는 전대미문의 종교, 예수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80리길 평양 나들이에 나섭니다. 평양에서 만난 홀(W. J. Hall) 선교사에게서 전도책자를 건네받은 전삼덕은 서서히 기독교 진리에 눈을 뜹니다. 매주 평양 길을 오르내리면서 ‘구도’(求道)의 삶을 살았고, 2년이 흐른 1895년에 시집과 남편의 온갖 박해를 뚫고 마침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도부인, 복음들고 전국을 누비다
그 뒤 전삼덕은 ‘전도부인’(Bible Woman)이 되어 집을 떠나 강서, 함종, 삼화 등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양반집 아녀자로 규방에 갇혀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이가 기독교를 만나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그 옛날 ‘나사렛의 여인들’처럼 집 밖으로 나와 전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뭉클한 이야기입니까. 전삼덕은 193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아홉 개의 교회와 한 개의 학교를 세웠다고 합니다. 환갑을 넘어 전도부인을 그만둔 뒤에는 고향에 세운 숭덕학교에서 ‘남존여비’의 풍조를 깨뜨리기 위해 여자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1925년에 열린 ‘전삼덕 여사 전도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안 뒤로 나는 자주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비인간’의 삶을 강요받던 전삼덕에게 기독교는,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진짜 사람’의 삶으로 이끄는 탈출구였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유교 조선의 여성들이 덧쓰고 있던 온갖 굴레를 벗기고 그들에게 ‘하나님 형상’의 본바탕을 고스란히 되찾아 준 것입니다. 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교회로 몰려들어와 1905년에 이르면 여자 신도의 수가 남자 신도의 수를 넘어섭니다. 이들이 전도부인이 되어 나라 곳곳을 누비며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두멧골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집안 깊숙이 갇혀 있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합니다. 평양의 김세지도 그러한 전도부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열여덟 살에 과부가 되었고, 홀아비를 만나 재혼했지만 주색잡기에 빠져든 남편 탓에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김씨 부인은 남자의 주색잡기를 막을 수 있는 ‘교’(敎)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예배당에서 기독교 복음을 만나고, 이윽고 ‘영생’을 사모하여 세례를 받습니다(1896년). 그냥 ‘김씨 부인’으로 불렸던 여인은 세례와 더불어 ‘세지’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름도 없이 침묵하며 살아야 했던 조선 여성이 기독교를 통해 글을 깨치고 말을 하며, 마침내 자기 이름을 갖고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여성, 기독교의 새 역사를 쓰다
이제 김세지는 자신이 겪은 자유와 해방의 경험을 다른 여성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는 전도부인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1903~1915년의 선교사 보고에 따르면 김세지는 날마다 대여섯 가정을 방문하고 매달 두 번 이상 장례가 난 집을 찾아가 시체를 염하면서 전도했고, 해마다 30여 명의 새신자를 얻었다고 합니다. 평양 남산현교회 여신도들과 ‘보호여회’를 조직하였고(1903년) 교회 안의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과부회’도 만들었습니다.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성이 여성을’ 전도하고 구제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애국부인회’의 임원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탓에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여성 조직을 만들고 교회를 개척하는 그의 전도 활동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보쌈’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나이 어린 과부, 남편의 주색잡기에 혼자 끙끙대던 김씨 부인이 기독교를 통해 김세지가 되고 전도부인이 되어 조선의 기독교 역사, 조선의 역사를 만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김세지뿐이겠습니까?

수많은 전도부인들이 조선 여성들을 찾아가서 성경을 읽어주고, 글을 깨우치며,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길흉사를 도우며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에 터하여 기독교는 잠자는 여성을 깨우고 일으켜 세우는 해방의 종교로 자리 잡았고, 조선의 여성은 기독교 공동체와 나라의 주인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마침내 온 나라에 변화의 물결이 일렁입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