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그림그리는아빠'


할머니의 연세는 아흔 몇 세이십니다. 아흔이 넘은지는 오래 전이고, 백세가 안 넘은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아빠한테 할머니 연세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벌써 몇 년 째 하고 있습니다. 막상 아빠를 만나면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할머니 안부 묻기는 늘 뒷전이 돼버립니다.
돌쟁이 아들은 매 주일 교회 탁아부에서 성경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교회 탁아부에서는 아기들 반을 3개월씩 나눠 놓아서, 1월-2월-3월생이 한 반입니다. 나이는 같아도 1월생하고 12월생하고는 친구도 되지 못할 만큼 차이가 큽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든이나, 아흔이나, 아흔 다섯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계속 흰머리, 쪽진 머리 할머니였습니다. 아빠의 그림 속에서처럼 할머니가 물동이 이고 걷는 모습은 본적도 없습니다. 그림 속 할머니는 아빠의 어릴 적, 10남매를 기르시던 젊은 할머니인가 봅니다.
아빠는 늘 “할머니가 외롭게 지내신다”며 “불쌍하다”고 하십니다. 자녀를 열 명이나 두었는데도 홀로 시골에 계시니 말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늘 “할머니처럼 호강하는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연세도 많으신데 특별히 아픈 곳도 없으시고, 입주 도우미 아주머니랑 함께 지내시니까 말입니다. “불쌍하다”와 “호강한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자식과 며느리,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그런 우리나라 특유의 가족관계가 작용했나봅니다.  
이 그림은 올 1월 설 명절을 앞두고 아빠가 보내온 그림입니다. 아빠의 마음은 일찌감치 시골에 가있었습니다. 아빠가 먼 길 운전해서 가면, 젊고 건강한 할머니가 물동이 이고 반겨줄 것 같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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