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따뜻한 날씨를 뒤로하고 택사스로 향했다. 8시 첫비행기를 타기위해 우리는 4시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며 미국에 온지 이틀 만에 다시 새벽 4시 반에 다시 짐을 쌓다.

택사스에 있는 누구를 만나기 위해 이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만열 교수님에서 나온 것인데 교수님이 20년 전에 만났던 분이라고 한다. D클라크 교수라고 그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에서 선교사를 하셨고 그분 역시 한국에 살았고 지금도 한국을 오가고 한국에 관련된 일을 꾸준히 하고 계시면 그분은1980년때부터 선배 선교사들과의 인터뷰한 자료가 있다고 하였다. 사실 그분에 대한 인터뷰보다 그분이 갖고 있다는 자료와 그분이 본 그 당시의 선교사들의 삶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이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한국인이었다

D.클라크 교수의 할아버지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한국이름 곽안련 선교사라고 승동 교회를 세우시고 20년간 담임목사를 하셨으며 그분의 80여 인생의 절반이 40년을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셨다. 그리고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인 곽안전 선교사 역시 만주와 청주에서 활동한 2세 선교사였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로버츠(Stacy L. Roberts, 羅富悅)한국 이름으로 나부열선교사인데 그분은 오산학교 교장과 평양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 쟁쟁한 선교사의 자손이 어떻게 살고 있고 한국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궁금했다.

 

도착한 곳은 신학교였고 그곳에서 클라크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종교사회학, 동아시아지역 종교학, 선교학등을 강의하고 계셨다. 그분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으로 사셨다고 한다. 또 그의 아버지는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평양에서 자랐다. 겉모습은 외국인이지만 그는 한국인이었다.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모두 한국에 있었고 그의 추억은 모두 한국에 있었다. 그런데 신사참배 때문에 일본에 의해 쫓겨났고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하였기에 다시 다른 나라에 선교사로 갈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D클라크 교수는 콜럼비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10살까지 살다 54년 한국에 왔다고 한다.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버지가 늘 말해줬기 때문에 그는 한국이 너무 아름다운 곳, 꿈에서도 그리운 곳이라고 해서 정말 아름답겠구나 생각했는데 54년에는 전쟁 후 너무 큰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한국을 보게 되었다. 그가 처음 본 한국은 대포와 군인 그리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무질서의 현장 바로 그것이었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자료

10살 남자애가 본 한국은 아름다운 곳이 아닌 피폐한곳,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곳, 실제 전쟁이 일어난 곳이어서 참 흥미로웠다. 그의 부모님은 이곳에서 계속 선교사역을 하셨고, 그는 이곳에서 4,19와 5,16,그리고 80격동의 시대를 한국에서 겪었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금산에 살기도하고 결국 그는 한국사를 공부하고 하버드에서 학위를 마쳤다. 그리고 지금은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한국과 일본 중국에 대해 강의하고 사회학적으로 기독교와 종교들을 비교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다.

그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자료들이다. 그것은 한국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이고 한국 기독교 역사였다. 그 자료들을 그는 가족과 상의해서 광나루에 있는 장신대에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관심 있는 학생들이 연구할 수 있게 자료실을 마련할 거라고 하였다.

앞으로 3-4년후에는 장신대에서 그 자료를 보며 한국기독교 역사를 확인할수 있게 될 것 이다.

그가 본 선교사들은 어떤 분일까? 그분들은 나서는 것과 자신을 업적을 과시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셨다고 한다. 특히 어느 학교 몇 년 기념행사에 오라고 할 때 가장 많은 고민을 하셨다고 한다. 제발 업적에 대한 칭송이 없었으며 좋겠다고, 그것이 가장 어려운부분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선교사로 나온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시작된것이지 누구의 칭송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을려고 한것이 아니라서 한국교회가 높여줄때마다 곤혹스럽다고 하셨다. 그것이 그분들의 진정한 마음이라고.

그런데 지금 너무 새삼스럽게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가 호들갑을 떠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사역한 선교사들의 마음이었다.

제발 동상을 세우는 일을 하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마펫 선교사에게 동상을 세운다고 하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새들이 머리에 똥이나 쌀 텐테 뭐하러 그런 것을 하냐”고 했다. 아마 에비슨선교사 역시 자신이 지금 동상이 세브란스에 세워진 것을 알면 놀랄 것이라 하면서 선교사들은 업적이나 치적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해야 될 일이기에 묵묵히 일하며 살았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40년을 보내다 보니 그들이 이제는 한국이 고향이 되었고 미국에 가는 것이 더 무의미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한다. 그냥 친구로 선교사로 열심히 산 것에 대한 존경이면 그만이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기억했으면 하였다.

그가 지금도 2년에 한번 북한에 들어간다. 북한 돕는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잘 진행되는 확인하기 위해 가고 있다. 북한은 40년 전의 한국과 같은 상태라서 너무 안타깝다. 북한에 가보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좋아하셨을 것 같다고, 평양과 대동강을 보고 할아버지가 살던 곳을 보면 참 감개무량 하다고 한다.

이제 자신들은 고향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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