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발행인 박 에스더님이 들려주신 얘기 가운데, 제 가슴에 별처럼 아름답게 남은 한 단어가 있습니다. “착한 누룩”이라는 단어입니다.

공평과 정의, 개혁의 소리는 무수하지만 세상은 더욱 냉랭해져만 갑니다. 옳은 소리는 가득하지만 희생은 의문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사역이 착한 누룩 ‘아름다운 동행’ 이였다지요.

바다까지 가는 먼 길

외로울 까봐

흐르는 강물 따라

피어난 물안개

또 하나의 강이 되어

나란히 흐릅니다

 

 

나란히 가는

두 개의 강

벌써 바다입니다 

 

[두 개의 강 / 한희철 목사]

 

얼마 전, “따뜻한 동행, 고마운 걸음”이라는 따뜻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한희철 목사님의 신간 “작은 교회 이야기” 출판 기념행사입니다. 오르텅스 블루가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한 목사님의 신간 ‘작은 교회 이야기는’ 그런 심정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들을 위하여’ 라는 시에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한 목사님은 그렇게 상한 영혼을 위하여 단강으로 가셨을 테지요.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부임지로 가게된 강원도 단강은 땅 끝과도 같았습니다. 단강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단어는 이미 퇴색되어 남루해져버린 너덜너덜한 단어였지요.

하늘을 소망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땅을 끝내 사랑해 내는 일은 자아가 거꾸러지는 일입니다. 목사님은 그 땅을 거룩한 땅이라고, 내가 선 곳이 성소라고 여기시며 천국은 땅을 사랑하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셨지요. 목사님은 그 땅의 사람들을 강도만난 이웃이라 여기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외로움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들을 돌아보고 품어 안고 끝내 사랑하는 일을 예배라 여기셨지요.

불영 과 불행 ( 不 盈 科 不 行 )이라는 말이 있지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목사님은 늘 그러했습니다. 농로를 지나실 때는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과 먼 인사를 외치시다가 이내 가던 길 멈추고 팔다리를 걷어 올리시고 허리 숙여 일을 돕곤 하셨지요.

저녁 어스름한 시간이면 동산에 올라 마을 집들의 굴뚝을 살피곤 하셨지요.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엔 무슨 일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달려가 보면 홀로이신 어르신이 몸져누워 계실 때가 많습니다. 따뜻한 밥을 지어 드리고 약을 사다 드리고….

어떤 할머니는 설탕을 쏟아 부은 듯 한 커피를 정성껏 목사님께 대접합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의 외로움과 적적함을 아시고 꾸역꾸역 다 드십니다. 그리고 끝도 없는 할머니의 장황한 얘기를 묵묵히 들어 주시곤 하셨지요. 단강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 보여주려 꿈을 품으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얘기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단강을 떠나 독일로 사역을 떠나는 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교회 앞마당에 다 모여 이렇게 얘기 했다지요.

“목사님, 목사님이 이곳을 떠나지 않으신다면 우리 모두 교회 나가겠수” 그때 목사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 나오시는 분은 교회 나오시는 교인이고, 교회 안 나오시는 분은 교회 안 나오시는 교인이십니다.”

목사님의 사랑의 품은 안과 밖 구분이 없었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얼마나 주고 무엇을 버렸느냐겠지요.. 쓰러진 꽃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하늘을 본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가 하늘을 보는 이유가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이 시대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용이 형식이 되고, 형식이 내용이 되면 딱 좋겠다.”

살아낸 것만이 신앙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착한 누룩은 외침이 아니라 희생이며 고백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다는 건 그의 안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사랑하면 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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