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한국교회사이야기] 5. “백정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종교가 들어왔다.”

변두리 사람들로 가득 찬 곤당골교회

서북 지방 젊은이들의 헌신과 개화 지식인 이수정의 노력, 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조선 선교에 나섰던 서양 선교사들의 열성이 맞물리면서 마침내 조선 땅 곳곳으로 기독교가 퍼져 갔습니다. 여기 저기 교회가 세워지고, 곳곳에 ‘예수쟁이’와 ‘예수꾼’들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조선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 대부분이 돌쟁이․땜장이․장사꾼․머슴꾼같은 변두리 사람, 하층민이었던 탓에 세인들은 그들을 예수쟁이나 예수꾼으로 부르며 애써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의 처음 교회는 이렇게 변두리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백정과 갖바치, 기생들이 유별스레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본보기가 바로 곤당골교회(지금의 승동교회)인데, 백정(백장)들과 첩살이하는 여인들, 몸종들로 넘쳐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첩장교회’라며 대놓고 업신여겼습니다. 하지만 ‘첩장교회’야말로 오히려 명예로운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이 빛을 보는”(마4:16) 사건이야말로 복음의 참맛일 테니까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1893년, 무어(S. F. Moore) 선교사가 시작한 곤당골교회는 본디 양반 마을인 곤당골에 자리 잡은 ‘양반교회’였습니다. 그런데 1894년 즈음에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이곳 곤당골 예배당에 나타났습니다. 중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른 그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인 제중원 선교사 에비슨(O. R. Avison)이 백정 마을인 관자골까지 찾아가 직접 치료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박성춘은 자신의 비천한 신분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보살펴 준 선교사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신분 질서가 엄연하던 때인 만큼 이내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백정과는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며 양반들이 불평을 터뜨린 것입니다. 백정 박가를 다른 교회로 보내라, 그것이 어렵다면 예배당 뒤쪽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거기 앉히라고 야단스레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무어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독교 진리를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결국 양반들이 따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곤당골교회 설립 2년 만인 1895년의 일입니다. 입장이 난처해진 박성춘은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수원까지 내려가 백정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백정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종교가 들어왔다.”

 

 

예수쟁이의 정체성

박성춘에게 기독교는 백정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종교, 위아래도 높낮이도 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고 존중하는 해방의 종교였습니다. 그런 종교가 들어왔다니, 이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박성춘이 전도를 시작하고 얼마 못가 곤당골교회는 백정과 천민으로 가득 찹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인간 평등’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 공간이었습니다. 신분차별과 남녀차별이 기승부리던 시절이지만, 교회만큼은 반상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서로 형제․자매로 부르고 성도(聖徒)라 일컬으며 불평등과 차별의 습속을 바꾸어 나간 까닭입니다.

복음과 교회를 통해 해방을 체험한 박성춘은 내친김에 ‘백정 해방 운동’에 나섭니다. 그는 정부에 백정 차별을 시정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여 마침내 ‘백정도 양반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5백 년 내내 쓰지 못했던 망건과 갓을 쓰고 종로 네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백성과 마찬가지로 백정도 민적(民籍)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백정의 아들 박가’는 새봄을 맞아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성춘(成春)이라는 이름을, 그의 아들은 상서로운 태양이 되라는 뜻에서 서양(瑞陽)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름 없던 백정들이 버젓한 이름을 얻고, 쪼그라든 채 밑바닥에서 나뒹굴어야만 했던 천민들이 떳떳하게 서울 거리를 걷는 모습, 그 번듯하고 거침없는 기세.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고서도 여전히 천민 출신이라고 업신여김 받던 예수꾼이 민중 지도자로 거듭나고, ‘첩장교회’라고 놀림 당하던 교회가 자유와 평등을 심는 해방 운동의 바탕으로 어엿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갈라선지 3년 만인 1898년에는 교회를 합치자는 양반교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마침내 양반과 천민이 함께 ‘평등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듯 교회는 신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평등 공동체로 커갔고, 기독교인은 너도나도 낡은 사회 질서를 혁파하는 개혁 일꾼으로 자라났습니다. 요컨대, 기독교는 세상의 질서에 맞장구치거나 들러붙지 않고 도리어 세상 질서를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으로 뒤엎는 변혁의 이념이자 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쟁이가 늘어날수록 사람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불평등이 자꾸 허물어지고, 예수꾼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나라를 만들려는 개혁과 혁명의 열기 또한 달아올랐습니다. 이제 예수쟁이나 예수꾼은 기독교인을 낮잡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인다움을 일컫는 말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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