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에 박힌 ‘소녀’엄마들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어느 덧 두 번째 달을 맞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코끝이 매섭던 작년 연말이 생생하다. 미혼모들의 출산과 양육, 자립을 돕고 있는 ‘구세군 두리홈’ 연말모임의 기억 때문이다.

쏟아지는 송년모임에 지치고 아직 채점을 못 마친 기말시험지에 치어서 몸이며 맘이며 전혀 여유가 없던 날이었다. 더구나 몇 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한파까지 몰아닥친 늦은 밤이었다. 미혼모들의 경험수기를 모은 책『너도 꽃, 이제 피는 거야』(행간, 2011)에 추천사를 써준 인연으로 초대된 자리였다.

그저 얼굴도장만 찍고 나올 양으로 행사 시간보다 일찍 간 것이 어쩌다 식사자리까지 동석하게 되었다. 하하 사람 좋게 웃기는 해도 어색함에 엉덩이가 들썩일 무렵, 저 만한 아기들을 앞에 매고 뒤에 업고 추울 새라 꽁꽁 동이고 들어오는 ‘소녀들’을 보고 난 그만 심장이 삼십 센티쯤 덜컹 내려앉았다.

예뻤다. 참 기특했다. 이미 읽어본 수기내용인지라 안타까운 마음에 칭찬도 하고 격려도 하는 추천사를 써주었지만, 이리 턱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가들을 실제로 보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미혼모. 그녀들이 아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하는 이름

미혼모. 비행소녀의 성적 방종의 결과인양 죄인의 낙인을 새기고, 행여 이 아이들이 순진무구한 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줄까 싶어 경계하는 세상은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 비로소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이해가 되었다. 더 공부하고 싶어 하는 어린 미혼모에게 차별 없이 교육의 기회를 주자는 인권 선언이 성적 방종을 부축키는 정책으로 ‘읽히는’ 세상을 살려하니 이 아이들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어야 했을까?

나이 서른에 엄마가 되고서도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겨워 절절매던 나로서는 이제 열여섯, 열일곱 어린 소녀들이 ‘생명’을 선택한 대가로 치르는 상상을 넘어선 사투가 경이롭고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미혼모! 그 이름은 그녀들이 부끄러워할 이름이 아니다. 실은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두가 부끄러워해야하는 이름이다. 사랑을 어찌 혼자 했을까? 아이 아빠가, 그가 어리다면 그의 부모가 그 사랑에, 그 생명에 책임지겠다 선언하는 한 어찌 ‘미혼모’가 될까! 살뜰히 보살피고 지혜롭게 조언하는 부모가 있었다면 그 어린 나이에 덜컥 엄청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을 무모히 저지르지도 않았을 일이다. 하나같이 외로웠다고 하는 소녀들.

아빠도 엄마도 사랑해주지 않아 늘 사랑에 굶주렸다던 아이들. 때문에 서둘렀던 어리고 서툰 사랑이 그리 엄청난 대가를 치르라 종용하게 된 거였다.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래도 신통하게 낙태도, 영아유기도, 입양보내기도 아닌 ‘엄마되기’를 선택한 그녀들이건만 세상은 왜 그리 냉정한 시선으로 어린 어깨에 삶의 무게를 더하려 할까? 그날 발표회에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싶지만 어느 학교도 미혼모인 자신을 받아주지 않아 결국은 검정고시로 과정을 마친 한 소녀의 이야기도 있었다.

며칠 전 한국일보 인터넷 기사(2012년 2월 6일 월요일)에도 ‘등록금은 대출로 매우고 육아위해 닥치는대로 알바하고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아이 잠든 새벽 짬내 공부해서 성적장학금 타낸’ 어느 ‘싱글마던트’ 이야기가 실렸다. ‘마던트’는 마더(mother)와 스튜던트(student)의 합성어지 싶다. 엄마는 장애가 있어 도움을 청하기 힘든 상태라 하고 아이 아빠는 군대로 도망간 상황이란다. 그리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꽃같이 예쁜 그녀에게 지나가는 할머니는 혀를 차며 말씀하셨단다. “애가 애를 키우니까 저 모양이지, 말세야, 말세!”

 

 

사랑의 이름으로 동행하기

자신의 아이를 위해 꿋꿋이 홀로 서겠다는 어린 엄마들. 때문에 학업도 직업훈련도 철인 같은 체력과 의지로 버텨내는 기특한 그녀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고작 냉대어린 시선과 수군대는 뒷말뿐일까? 내 아이 다 키워놓고 남아도는 시간과 허전한 마음에 ‘빈둥지증후군’ 선언하며 쇼핑중독에 걸린 ‘선배’엄마들은 미혼모를 비난하지 않은 것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일일까?

‘그것 봐! 역시 혼전순결 도덕교육이 정말 중요해’ 예방 프로그램 만들기에 급한 교회는 그것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것일까? ‘정죄함’이 아닌 ‘동행함’을 택하셨던 분, 돌이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힘’이 되셨던 분, 적어도 그 분을 우리의 주라 고백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린 엄마들의 지친 삶의 길목에서 따듯이 맞아주고 동행해야 하지 않을까?

‘너는 꽃! 예쁜 아이들아, 너도 이제 피는 거야!’ 그리 격려하면서 어린 두 생명을 품어 안을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에, 아직은 이른 봄 꽃샘추위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백소영 교수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이다.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 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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