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Louise Grubb)선교사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여정을 풀지도 못한 채 첫 번째 인터뷰 대상자를 만나러 가야 했다. LA에서 이틀 머물고 있는 동안 총 5명의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처음 만난 분은 북장로회 소속의 루이스 선교사였다. 남편은 대구와 안동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하신 구의령(혹은 구의련) 선교사였고 40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신 분이셨다.
루이스 (Louise Grubb)선교사가 머물고 있는 곳은 LA에서 북쪽을 올라간 곳은 북장로회 소속 은퇴한 선교사들이 있는 ‘웨스트민스터가든’이란 곳이었다. 그곳은 아주 넒게 자리 잡은 곳으로 주택가 주변에 있다. 건강하신 분들은 타운하우스 같은 곳에 살고 계시고 본관 에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간병인의 집중적인 도움을 받으며 머무르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는 루이스 선교사를 돕는 분에게 이메일을 보내 인터뷰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루이스 선교사는 90세가 넘은 분이셨다. 작은 목소리는 흔들렸고, 그분의 기억도 흐릿했다.  무엇보다 앞을 잘 보지 못하셨다. 또한 귀도 어두우셔서 우리는 그분과 대화하기 위해 주변으로 가까이 모였다. 마치 할머니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듣는 손자들처럼 우리는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인자한 할머니처럼 그녀는 우리를 반겼다. 자신은 독일어와 스페인어, 한국어를 조금했지만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남편 구의령(William Albert Grubb ) 선교사가 있다면 정말 좋아 했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하면서 한국말을 잘하는 남편과 달리, 한국어를 잊어버린 자신을 소개하며 미안해 하셨다. 활발하고 사람을 좋아해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그녀의 남편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남편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오다
그녀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1950년 한국이 전쟁이 난 후 추수감사절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다. 프린스턴대학 식당에서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 옆에서 식사를 했는데 남편은 자신이 곧 한국에 갈 거라고 하면서 한국에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때 루이스는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었고 물리치료로 인해 한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 전쟁 중인 한국을 찾았다. 그 당시 그녀는 기업에서 후원하는 MBP프로젝트로 왔으며 노동자들의 손과 팔등을 치료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당시 한국이 아직 전쟁 중이라서 모든 것이 폐허였고, 그 비참함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컸다. 전쟁 속에서도 빨리 복구 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며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과 결혼하고 대구로 내려갔다. 남편과 함께 계명대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고, 학생들에게 영어성경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녀의 직업은 간호사였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한센병환자(문둥병)가 있는 곳에 가서 봉사를 했다. 그들에게 방직과 미용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을 가르쳐 사회에 나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센병 중 전염성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녀는 그들을 돌봐주는 것이 참 행복했다고 한다.

3명의 자녀를 한국에서 낳고 길렀는데 그것이 너무 잘한 일이라는 말에 정말 놀랬다. 자식들에게 최고의 환경이라 생각하는 그녀의 말이 우리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행복했고 한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대전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모두 “행복한 경험”이라 말했다고….

그녀는 인터뷰 내내 “한국 사람들은 너무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을 잊을 수 없다”, “그들과 너무도 행복했다”, “자신의 삶 중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은 바로 한국에 머물렀던 40년이었다.”라고 수차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울컥했다.
연세가 70이 넘으신 이만열 교수님도, 젊은 소장파 교수들도, 그리고 촬영하던 우리도 눈물을 흘렸다.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20대 말에 시작된 한국생활이 60세 중반이 되어 끝난 선교사 생활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녀.

그녀에게 한국은 좋은 친구
한국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좋은 친구들, 좋은 그리스도인, 친절함, 사랑스러움, 배려심이 깊은 사람들…. 그들에게 어떤 말을 더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은퇴해서 미국에 온 것이 아쉽다고 말할 때 나는 결국 펑펑 울고 말았다.
우리가 그렇게 좋은 존재 인가? 그들이 와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정말 행복했고 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남을 위해 도움을 주는 존재인가? 나는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그녀는 계속 한국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한 선교사를 보내며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녀는 우리가 가져간 선물, 포장지, 편지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셨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북한에 가는 것이다. 자신이 갈수만 있다면 북한에 가고 싶다고, 그곳에서 어떤 사역이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씀이 생각이 났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장 35절” 그녀를 보면서 나는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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