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민들레 홀씨의 말

사무실 대문 밖, 손바닥만 한 거미줄에 민들레 홀씨 하나가 실바람에 살랑거리며

걸려 있었습니다. 민들레 홀씨는 저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을 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집게손으로 민들레 홀씨를 조심스레 잡아 수돗가 옆 작은 화단에 심고 손 우물을 부어 주었습니다.

'언제 쯤 싹이 날까? 꽃이 피면 얼마나 예쁠까!' 그리고 돌아선 제 등 뒤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당신은요, 저의 미래를 살려 줬어요.”

몇 해 전, 제에게 일어난 하나의 은총입니다. 지상에 종말이 없다면 그 민들레 홀씨 안에는 우주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민들레가 들어 있겠지요. 작고 초라한 것까지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저 스쳐 갈 수많은 아름다운 가능성들이 빛을 보겠지요.

사랑이란 어떠함에도 아름다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눈이라고 합니다. 그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살필 수 있다면 아픈 사랑에 젖어 계신 하나님의 얼굴에 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지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맑은 하늘을 바라 볼 때, 발 아래 풀꽃을 살필 줄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응달 목련의 말

어느 봄날, 햇살 속에 만개한 목련을 만났습니다. 봄을 만끽하며 노래를 하고 있었지요.

참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저만치 빌딩 사이에 그것도 짙은 그늘 아래에 서 있는 작은 나무가 보였습니다. 아직 꽃 몽우리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는 어린 목련이었습니다. 빌딩 사이엔 아직 긴 꼬리를 감추지 못한 겨울바람이 매섭습니다.

안쓰러웠지요. 도시 미관이라는 명목으로 어쩌다 봄이 와도 햇살 한 번 못 받는 도시 응달에 심겨져바로 옆에 만개한 목련을 먼 세상 풍경 보듯 바라만 봐야 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목련은 오히려 밝은 목소리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봄 배웅 꽃으로 활짝 필래요.”

“…….”

“나는 왜!”라며 얼마든지 억울하다고 원망해도 들어 줄 만한데 어린 목련의 밝음은 이 세상의 마음이 아닌 듯합니다. 마치 세상에 영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듯합니다. 높은 빌딩 아래서 봄의 영광은커녕, 혹한 겨울바람만 맞던 어린 목련은 마치 이 땅에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도종환 시인은‘꽃이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집니다’라는 시집에서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이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야생화의 말

언젠가 야생화로 잘 꾸며진 예쁜 카페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카페를 둘러보며 솔로몬의 영광보다 나은 꽃들을 보았습니다. 나오는 길에 야생화에게 말을 걸었지요.

"야생화야, 여기가 좋으니??"

"들이 더 좋은데요."

“…….”

그 옆에 놓인 아주 작은 야생화에게도 물었습니다.

"어린 야생화야, 넌 여기가 좋으니??"

"저, 야생화 아닌데요. 저는 재배…."

"……."

그 어린 야생화는 야생을 모릅니다. 그런데 야생화라고 합니다. 야생화 카페를 나와서,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카페주인은 야생화의 마음을 알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참 모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마음. 심지어 무생물도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걸….

‘누군가의 가슴 다 울리지 못해 나 아직 종이라고 이 좁은 가슴 다 울리지 못해 나 아직 종 아니’라고 한희철 목사님은 스스로를 종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한희철/종)

그런데 이런 고백이 왜 그렇게 제 가슴을 크게 울리게 하는지요. 약자의 눈물은 세상을 가장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랑은 늘 아파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겠지요. 누군가 예술의 정의를 “우리로 견디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피어난 꽃들이 우리로 견디게 하듯 우리도 이 세상에 천상의 꽃으로 피어나 세상이 우리로 인해 아름답게 견뎌 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