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선교사이야기]

 

두 번째 인터뷰

미국에 온지 둘째 날이 되었다. 미국에 오기 전 3주일치 일을 미리하면서 무리를 했고, 시차 적응도 못한 상태에서 첫날 인터뷰를 강행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힘들었던 모양이다. 온 첫날 나는 밤새 감기 몸살을 앓으면서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죽음만큼 아팠다. 컨디션은 최악이고 목소리조차 잘 나오기 않는 상태에서 아침부터 또 인터뷰를 했다. 오전과 점심 인터뷰가 끝나고 잠시 여유가 생겨 이만열 교수님의 지인을 만났다. 이만열교수의 제자인 그 분은 자신이 교수님께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공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때 교수님의 지원으로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그렇게 후원한 것을 한 번도 내색하지도 않고 도리어 쑥스러워 하며 내색하지 않으시는 교수님께 진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느끼게 되었다는 말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오랜 시간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얼까’ 고민했었다. 누릴 것을 포기하는 삶, 인격이 함께 성숙하는 모습이 기독교인의 모습임을 교수님을 통해 보게 되었다. 교수님을 가까이서 모시게 된 것이 참 감사했다.

진 언더우드를 취재하기 위해 1시간 반을 달려서 글렌데힐 근처로 갔다. 미국에 오기 전 그 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언더우드 가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 게 전부였다. 한국에서 수 십년간 일했던 수많은 선교사들은 이름도 빛도 없이 사그러져 갔다. 그분들의 청춘과 인생을 모두 바쳤는데도 말이다. 단편적으로 사람에 따라 정보를 가지고 있기에, 알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만 자료를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저녁 8시가 되어 그 집에 도착했다. 혼자 살고 계신 진 선교사님은 생각보다 연세가 있는 분이셨다. 1928년생의 80세가 좀 넘으신 할머니였다. 처음 집에 도착했을 때, 한국풍으로 꾸민 거실에 우리는 사뭇 놀랐다. 한국의 작은 자개장부터 병풍과 각종 집기류에 이르기까지…. 도리어 서양화된 우리의 집이 생각나 머쓱해졌다. 그 가구들이 한국을 향한 그분의 마음처럼 느껴져서 부끄러웠다.

변화된 사역지

그녀는 외동딸로 캘리포니아 포모나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비올라를 전공하고 필리핀의 중앙필리핀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학과 음악을 가르치는 선교사로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한국하면 전쟁이 난 나라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선교를 준비하던 중 그녀는 한국에 대해 말하는 존 언더우드(당시 언더우드는 진보다 거의 10살 정도 나이가 많았다.)를 만나게 되었다.(존은 H. G. 언더우드의 손자이다. 우리가 잘못알고 간 것이다. 그녀는 정통 언더우드의 손주 며느리였다.) 존은 신학교를 다니며 한국 전쟁 의 참상을 알리고 많은 선교사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일을 했다.

그의 강연에 감동을 받은 진 선교사님은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고, 결국 한국에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다. 1954년 결혼과 함께 시작하여 1993년 은퇴했다. 거의 40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1954년, 한국에 와보니 전쟁 직후라 파괴된 건물에서 사는 사람, 다리 밑에서 사는 사람, 고아, 불구자 등 참혹 그 자체였다.

첫 사역지는 청주의 맹인학교였다. 당시에는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매일 학생들에게 먹일 것을 구해오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청주 맹인학교에는 밭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 뭐가 나오기만 하면 맹인들이 못 보니까 주변사람들이 먼저 모두 쓸어가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 더 힘이 들었다.

근처 지역에 목사가 거의 없어 형편이라, 남편인 존은 매 주일마다 지방교회를 순회하며 설교와 전도를 하고, 그가 못한 일들은 전도부인이라고 해서 주로 혼자 사는 여자분들이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목사들에게 드리는 사역비 역시 어려운 형편이라 대부분은 작물이나 음식으로 대신했다. 그들은 67년까지 여러 교회를 섬기면서 동시에 성서학원, 맹인학교에서 가르치며 그곳에서 사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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