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천국 패밀리]

우리는 여덟 명의 대식구로 온 가족이 교회에 다녔다. 나는 6남매 중 다섯 번째인데,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날은 늘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그 때 네 살 아래의 동생은 어디 있었을까? 어려서 자고 있었을까, 아니면 나가 놀았을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언니, 오빠들이야 일터나 학교에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가정예배는 나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찬송을 함께 부르고 엄마와 내가 번갈아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60년대 세로로 글이 써진 성경은 어린(아마도 6-10살) 내가 따라서 읽기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엄마는 꼭 한자가 섞인 성경책을 보았다.
가끔 모르는 한자가 나와 머뭇거리면, 빨리 읽으라고 재촉하셨다. 뜻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열형 글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손가락으로 줄을 짚어가지만, 어떤 때는 딴 생각으로 줄을 놓치고, 어떤 때는 졸음이 너무 와서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엄마는 그런 내 태도를 고쳐주느라 그랬는지 종종 그 다음 글자가 뭐냐고 물었다. 내가 깜짝 놀라 '어디야' 라고 물으면 혼이 나면서 제 자리를 찾아야 했다. 어떤 때는 대충 찍어서 단어를 말하기도 했다. 한 번도 제대로 맞춘 적이 없었다. 바로 다음 줄이거나 몇 줄이나 뒤였다. 그러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한테 그토록 지루한 성경읽기가 또 있을까? 고어체 문장에다가 글자도 작고, 보기도 힘든 세로쓰기를 따라 읽기란….


성경 한 장을 그렇게 다 읽고 나면 엄마는 이어 기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분한 감사로 시작되어 눈을 감고 듣을만 했다. 하지만 '이북에 계신 어머니'를 입에 올리는 순간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점차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갔다. 더 이상 기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어야 할지, 수건이라도 가져와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할 때가 많았다. 무서움이 몰려와 눈을 떠서 엄마를 쳐다보면, 평소에 보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상했다. 엄마는 저렇게 어른인데도 어머니를 그토록 그리워하는지. 저렇게도 슬피 아이처럼 울 수 있을까.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기도(식구가 많으므로 한명씩 이름을 불러 하다보면)가 어렵게 마치고 나면, 나는 웃어야 할지 도망가 숙제를 해야 할지 멋쩍었다. 나에게 가정예배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기억으로 남겨졌다. 
엄마는 그 때 가정예배를 통해 나에게 말해주려고 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한글을 완전히 익히게 하려고 했으며, 신앙을 돈독히 하려는 의도였다. 또 엄마 홀로 가정예배의 동반자로, 말을 잘 듣는 엄마 딸이길 원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가정예배는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엄마가 예배드리자고 하면 난처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동화책 읽는 것이 즐겁고 쉬운 일이 되었다.  또 이만큼이나마 주의 일을 하고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나는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무엇보다 가정예배 만큼은 밝고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혹 아이들을 슬프게 하지는 않는지, 강압적이진 않나 자주 되새겨보고 있다.
가정예배를 좋은 기억으로 남겨주고 싶다. 훗날 아이들이 힘들 때,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을 깊숙이 간직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긴 그마저도 우리 엄마식 가정예배가 나에게 준 안좋은 추억의 다른 교훈이기도 하다.

전영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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