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

# 숨어 계신 하나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하지는 못했다. 흔히 그렇듯, 집회에 다녀오면 신앙이 불붙다가도, 며칠 지나면 그만이었다. 김창기 목사(영상교회 담임) 이야기이다. 고3 때 대학 입학을 1년 미루고 재수를 하게 되면서는 술과 담배도 배웠다. 하나님은 있는 듯, 없는 듯 숨어계신 존재였고, 그의 인생에 독립변수가 되지 못했다.

젊어서부터 지구과학 과목을 좋아했고, 그에 따라 신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일까? 예수님일까? 늘 의심이었다. 대학에 개설된 비교종교학 과목도 수강했다. 그때 강의를 하던 교수님은 말했다.

“다른 종교는 다 인간이 찾아 나서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는 종교입니다.”

순간 ‘띵’하고 뭔가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래 기다려보자.’

기다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 간염, 과로로 쓰러지다

어느 수련회에 가서는 ‘감정에 도취되어’ 서원을 드리기도 했으나 그때뿐이었다. 하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인생은 술술 잘 풀렸다.

서울의 일류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전투기를 만드는 대기업에 들어가 돈도 많이 벌었다. 밤늦게 끝나고,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지만, 일이 좋았다. 내친김에 공부도 더 하고 싶었다.

욕심이 과했을까, 과로로 쓰러지고야 말았다. 간염이었다. 무한경쟁의 기업 시스템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찾아오라는 하나님은 어디에 가고 병이 찾아온단 말인가. 간경변 초기라는 진단도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다

당시 간염은 무조건 쉬어야 날 수 있는 병이었다. 쉬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때 특히나 힘이 된 것이 그의 아내였다. 양경심 사모는 남편을 위해, 매일 새벽을 깨우며 기도했다.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대전의 항공우주연구원에 들어가서 한국의 인공위성 ‘아리랑’을 쏘아 올리는 일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일하면서 과로를 피할 수 있어 좋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췌장암 판정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교회에 기도 부탁을 했다. 그리고 미국의 췌장암 수술 권위자를 찾아갔다. 의사는 수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 순간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만 살려주신다면, 제가 평생을 주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끝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 당뇨에 걸리다

간염을 지나치게 의식했을까. 쉬어야 병이 낫는다는 생각으로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몸무게가 80킬로그램을 넘어섰다. 20킬로그램 이상이 찐 것이다. 간염을 극복했다 싶더니, 당뇨가 찾아왔다. 당뇨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운동을 하면 간염에 안 좋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건강이 막 좋아진다 싶어서, 박사학위 공부를 생각했을 때였다.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질병이 발목을 잡았다. 40일 새벽기도에 돌입했다. 건강하게 해주세요, 박사학위 받게 해주세요, 기도했다. 20일쯤 지났을까? 기도의 응답이 들렸다. 뚜렷한 음성이었다.

“그러다가 죽는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가장 먼저 기도가 바뀌었다. 개인 중심의 기도보다,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더 많이 나왔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한 번 사는 인생,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하고 싶다.’

죽음의 문턱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그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적당한 수입과 적당한 행복 추구를 넘어서, 진짜 행복을 찾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는 그때의 두근거림은 아직도 심장에 남아있을 정도다.

“집사님, 신학을 하세요. 목회를 준비하세요.”

당시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을 통해 듣게 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가슴이 뛰었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음의 결정도 끝났고, 이제 다니던 회사만 그만두면 되었다. 무턱대고 사직서를 제출하니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인공위성 개발을 위해 2년 가까이 미국 연수를 다녀온 것이 문제였다. 그 기간만큼은 회사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사직이 쉽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도 목회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는 그를 말렸다. 교회를 다니는 직원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목사님도 회사를 잘 마무리하라고 하셨고, 까짓 거 1년 더 채우고 그만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뻔히 보이는 눈앞의 큰 기쁨을 포기하고, 절망을 택하겠습니까?”

그는 당시 위성 개발의 전체 책임자를 만나러 갔다.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책임자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기에, 대화가 통할지 불안했다.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퇴직을 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십시오.”

한참을 고민한 그 책임자는 이렇게 답했다. 충격이었다.

“내 어머니도 교회 권사예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막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 노골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한 달 반 만에 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합격했고, 전액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이후 서대전중앙교회의 전도사로, 부목사로, 수석목사로 사역을 하다가 지금은 서울의 영상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김 목사를 찾아왔다. 대학 때 배웠던 것처럼 ‘다른 종교와는 달리 하나님이 찾아온다’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말이다. 과로로 쓰러지던 그때, 간염, 간경변 진단을 받았을 때, 당뇨가 왔을 때, 하나님은 그를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가 진정 행복한 일을 찾도록 말이다.

사실 그의 새 삶을 도운 건 아내 양경심 사모다. 남편이 하나님과 멀어질 때마다, 기도로 붙잡은 것도 그이였다. 수입이 없어진 남편을 대신해, 과외, 유치원 교사 등의 일을 도맡았고, 주말이 되면 서울에서 남편의 사역지 대전까지 운전기사 역할을 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명을 잃어버리면 불평이 생기죠. 그런 삶은 곧 병이 되고요. 즐거운 사명을 찾는 것이 곧 하나님의 길이라 생각해요.”

즐거움의 길을 찾아서일까? 결정적인 순간마다 김 목사의 발목을 잡았던 간염(이항원)이 없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김창기 목사는 “신대원을 준비하고 지금까지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하였다. 남들은 좋은 직장 버리고 목회를 시작한 걸 ‘고난’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은 “생기 넘치는 진짜 삶을 찾은 게 너무 좋다” 한다.

물론 요즘도 슬슬 유혹이 틈탄다. 하고 싶은 게 많아진 탓이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당뇨 탓에 망막이 손상되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불평과 불만, 좌절에 빠져 있을 텐데 지금은 아니다. 죽기 직전이면 언제나 노골적으로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을 떠올린다. 공부만 시작하면 밤을 새우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망막의 손상과 함께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는 말했다. 제2의 인생은 “가장 행복한 일을 찾는 것”이라고…, 언제나 “자기를 살리기 위해 맨발로 뛰어오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범진 객원기자 poemgene@naver.com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