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서류를 검토해가던 김삭 과장의 시선이 창가로 꽂는다. 가는 한숨이 새 나온다. 어제 퇴근 때 현관에서 어쩌다들은 아내의 전화가 기분이 나빠 못 견디겠다.

여대 친구와 주고받던 아내의 그 전화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나 요즘 몹시 괴로워. 첫사랑을 회복해야겠어. 그 첫사랑이 그리워. 정말이야. 그땐 정말 사는 것 같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몰라.”

김삭 과장은 자기가 아내의 첫사랑인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도 놀라운 충격이었다. “무서운 여자였군. 아니 뻔뻔스런 여자였어. 차라리 연극배우로 나가지 그랬어. 쳇, 그러면서도 뭐 집사라구. 그러면서 나더러 교회에 왜 안나가냐구. 뭐 교회 가서 죄를 회개하라구.”

종일 그 일로 귀살스럽기만 한 김 과장은 생각할수록 분한 생각이 치받혀 견딜 수가 없었다. “흥, 그런 흠집이 있는 딸을 주면서 장모는 나한테 뭐랬지.” 결혼 당시를 생각하니 화가 더욱 솟구친다.

“예수님을 안 믿는다며 자네?”

“네.”

“그럼 허락할 수 없네.”

그런 수모를 당한 뒤 김 과장은 졸립기만한 잠공장 같은 교회를 꼬박 두 달을 다녔다. 그리고 성공. 결혼 직후에는 권사 장모의 눈이 무서워 교회에 출석하긴 했지만, 그가 성수주일을 안 지킨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건축헌금에 시험든 뒤부터였다. 그 날 아내와 된통 다퉜다.

“아니 여보 헌금이 뭐 공중에 버리는 돈인 줄 아세요? 당신은 너무나 인색해요.”

“여하튼 난 싫다구. 안먹구 안사 모은 그 예금통장을 몽땅 털릴 순 없다구!’

“어머머! 털리다니요. 말씀 삼가세요.”

“국세청 보다 더 무서운 데가 교회라니까!”

유교 집안에서 자란 남편의 마음문은 철대문이었다. 남편은 주일이면 등산을 떠났다.

기옥의 믿음도 점점 소멸돼 갈 뿐이었다. 이 기울어지는 믿음에 대해 “내가 뭐랬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메지 말랬는데… 널 속인거지, 기도해라, 나도 할테니”라고, 교회에 혼자 초라하게 나타날 때마다 어머니는 비난을 퍼부었다.

나라도 첫사랑을 회복해야겠다. 그녀는 그 사랑에 연연했다. 그럴수록 남편을 위해 기도가 나왔다. 방황하는 그 영혼이 불쌍했다.

남편 김 과장은 영혼뿐만 아니라 그 육체도 방황하기에 이르렀다. 그 날 퇴근 뒤 아내의 첫사랑에 대한 분노를 못이겨 그를 술집으로 전전케 했다. 안개비 속을 헤매는데 그의 눈에 현수막이 펄럭인다.

“아니, 뭐 부흥회라….”

김 과장은 술기운을 추스리며 한구석에 앉았다. 술 탓인지 생판 모르는 교회인데도 불편하거나 낯가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고 그는 잠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깨고 보니 의자에 길게 누워있다. 누가 씌워주었지 담요까지도 쓰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교인들은 썰물처럼 사라지고 혼자 새벽을 맞이한거다.

강단을 부끄럽게 바라보는 그의 눈에 “첫사랑을 회복하자”는 부흥회 제목이 클로즈업된다. 어디서들은 말이다. 아니 진종일 고민하고 미워해 온 아내의 말이었다. 소태껍질 씹은 표정으로 멍하니 앉았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처음 기도했다.

“주여! 나도 첫사랑을 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교회를 나오는데, 신선한 새벽이 가슴에 새큼하게 와 닿는다. 오래간만에 아내의 숨결을 봄바람 속에서 달콤하게 느껴본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