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카드’ 통해 지적장애아 한글 읽기 돕는 김영생 교암초등학교장

 

다운증후군을 앓는 박소영(17·미국 거주) 양은 동화작가인 이정애(52) 씨의 딸이다. 지능지수가 50 이하인 소영 양은 하지만 책을 읽는다. 그것도 잘 읽는다. ‘콩쥐팥쥐’부터 시작해서 벌써 수많은 동화책들을 섭렵했다. 통상적으로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지적장애아들은 ‘특별 관리 대상’이고, 이 말은 ‘포기’란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행정적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영 양이 한글을 배운 것은 전북 정읍에 있는 서신초등학교에서였다. 이 학교의 김영생(59) 교장이 ‘단기기억 접근 문자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적장애아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이정애 씨는 소영 양을 이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리고 세 번이나 이삿짐을 싸는 어려움 끝에 결국은 한글을 깨치고 동화를 읽게 되었다. 이 기적은 ‘자음카드’라 불리는 독특한 한글 학습 도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아이들

김영생 교장은 석 달 전 서신초등학교에서 인근의 교암초등학교로 전근됐다. 통상적인 근무처 순환에 따른 전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서신초등학교에 다니던 10명의 학생들이 김 교장을 따라 교암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이 학생의 부모들도 학생을 따라 이 학교로 옮겨왔다. 이 학생들은 모두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은 멀리는 경기, 인천 등 여러 지방에서 이 작은 소읍 정읍으로 전학 온 아이들이었다.
“통계적으로 100명 가운데 3명은 한글을 이해하는데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경우는 머릿속의 정보처리 능력이 1바이트에서 3바이트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7바이트, 8바이트짜리 정보를 입력시키면 당연히 입력이 되질 않습니다.”
김 교장에 따르면, 1바이트는 ‘ㄱ’ 혹은 ‘ㄴ’과 같은 자음 하나다. 여기에 모음 ‘ㅏ’나 ‘ㅓ’가 붙으면 ‘가’, ‘나’ 같은 하나의 음소가 된다. 지적장애아들은 이런 최소 단위의 글자를 익히는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갑자기 ‘철수야’나 ‘영희야’ 같은 7~8바이트짜리 정보를 입력시키면 당연히 과부하가 걸리고 이런 정보는 기억에 저장되지 못한 채 흘러나가 버린다.
‘자음카드’는 김 교장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개발해낸 독특한 한글 학습 도구이다. 이 카드를 이용해 김 교장이 얻어낸 ‘학습 임상사례’는 눈부시다. 초등학교 3~4학년까지 한글을 전혀 읽지 못하던 지적장애아가 김 교장의 한글 1500자 과정을 마친 후에 동화책 500권을 통독하거나, 어머니가 KTX를 타고 인천과 정읍을 오가며 중학생인 아들을 가르쳐 석 달 10일 만에 한글을 떼기도 한다. 장애아의 부모 입장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이런 체험사례들이 김 교장의 다음카페(
http://cafe.daum.net/Hangulsarang)에는 가득하다.

무기한의 감사

김 교장이 장애아들의 한글 교육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글을 떼지 않고는 이후의 학습 대부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글을 읽지 못하면 공교육 시스템에서 바로 탈락되고, 이런 탈락의 경험은 아이의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이는 자의반 타의반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왕따’시키게 되고 그 이후는 자발적으로 소외되고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 김 교장은 아이가 글을 읽게 되면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자심감의 회복이며 이 자신감은 미래에 대한 꿈으로 연결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김 교장의 이런 ‘교육적 실험’은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일부 학부모들이 김 교장의 학습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학부모들은 ▲학교가 지나치게 많은 특수아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 ▲학부모들이 장애아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에 들어와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문제 ▲특수아 중 일부가 학습을 위해 학년을 낮춰 수업을 듣는 문제 등을 들어 해당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교육청에서는 이 민원을 계기로 교암초등학교에 대한 ‘무기한 감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감사의 목표는 김 교감이 이 교육방식을 포기하거나 학교를 떠나는 것이다.

어쩌면 김 교감의 교육방식은 기존의 공교육 시스템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파격적’일 수 있다. 자신의 자식이 특수아들과 함께 교육받는 환경이 학부모 입장에서는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나와 다른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완고한 ‘인식의 벽’이다. 이 벽은 세상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과 창의성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흉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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