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환경질서의 회복과 환경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름다운동행’이 매월 개최하고 있는 ‘아름다운동행 조찬대화모임’이 11월 24일 서울 시청 앞 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모임에서 송준인 목사(청량교회)는 ‘개혁주의 생태신학과 기독교 교육’이란 주제로 발제했다. 이 자리에서 송 목사는 “창세기 1장 28절과 2장 15절의 이해와 오해가 하나님-인간-자연의 관계가 역할에 대한 오류를 만든다”며, “그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송 목사의 발제를 요약했다.

인간과 자연은 생태공동체

환경 문제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전 인류의 관심사이기에 교회가 회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이다.

생태신학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자연과의 사귐에 대한 신학적 근거 제시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또 생태신학은 필연적으로 윤리 문제와 결부된다. 또한 인간의 삶과 관련된 윤리는 결국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교육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신학은 기독교 환경 윤리 및 기독교 교육과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무의미한 논의가 되고 만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환경 의식화 교육에 교회가 앞장 서야 한다. 과거에 비해 환경에 대한 의식이 대중화된 실정이지만, 여전히 환경을 위한 실천의 질은 과거와 비슷한 수준이다. 사람들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희생과 봉사, 불편의 감수는 원치 않기 때문이다.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란 결국 의식화의 결여를 의미한다. 환경의식화는 환경문제에 대한 생각과 일상적 실천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중요한 열쇠다. “이를 위해, 교회는 인간중심적인 자연 이해를 극복해야 한다”고 송 목사는 말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의 이성이 극대화되고 자연은 대상화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에 빠지게 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은 인간에 의해 점점 더 조직적으로 착취되고 남용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지구 환경 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태신학은 인간과 자연을 이원론이 아닌, 상호보완의 운명공동체로 인식한다.

 

청지기=섬기는 이

창세기 1장 28절 말씀은 재해석되어야 필요가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지금까지의 ‘청지기’는 관리자(management)의 의미가 강했다. 여기에는 인간이 다른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자연에 대한 성경의 지배 명령은 경영하고 관리하는 이로써 행하는 무자비한 착취가 아닌, ‘돌봄과 가꿈’의 의미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절대 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청지기이다. 여기서 청지기는 ‘섬기는 이(servant)’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진정한 청지기는 ‘섬기는데’ 초점을 둔다.

 

자족하는 마음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현대의 소비행태, 그 근본에는 인간 가치관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인간이 자신의 소유욕, 부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환경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인간 욕망의 무한성과 지구 자원의 물리적 한계 사이의 생태적 모순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관, ‘자족’을 요청하고 있다. 성경 역시 이 ‘자족’의 가치관을 강조한다. 잠언 30장 8절에서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예수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의 형태(마6:21)”라고 하시며,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12:15)”고 경고하셨다.

 

절제와 금욕

오늘날 인류는 지구환경 위기에 직면하면서 금욕과 절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금욕과 절제는 중세 수도원주의와 같은 구원의 업적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의 새로운 생활양식이다. 중세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창조의 선함을 인정하지 않고 육체와 소유를 부정, 오직 물질적 궁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염세주의적 성격을 가지는 반면에, 기독교 의 절제는 부를 악으로, 가난을 선으로 보는 이원론을 거부한다. 기독교의 금욕과 절제는 삶의 부정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그 참의미는 축적하기 위한 절약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 행동으로써 그 동기가 이기적이지 않다. 진정한 금욕과 절제는 인간이 이웃,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윤리적 삶의 방식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의 환경 위기는 구조적이고, 조직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가치관과 소비행태의 변화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즉 환경문제 해결의 시작은 개인의 변화이지만, 이와 더불어 정치, 경제의 토대가 함께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정리=박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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