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도사’로 또 하나의 삶 사는 '사법 개혁의 전도사' - 법무법인 민우 대표변호사 문흥수


문흥수(54).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사법 개혁’을 떠올린다. 지금은 전관예우 금지, 평생 법관제 같은 말이 전혀 낯설지 않고 그 당위성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90년대 말 문흥수 판사가 이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때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시끄러웠다. 문 판사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법관과 변호사의 유착관계에 따른 추문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사법 개혁에 대한 목소리들이 들끓고 있을 때였다.

 

변화의 진폭

그런데 그런 추문의 핵심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 즉 전관예우의 문제를 다른 곳도 아닌 법조계의 현직 판사가 들고 나왔으니 그 파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시 문 판사는 선진국의 사례를 예로 들며 법관과 변호사의 유착과 같은 추문의 핵심에 ‘전관예우’가 있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관들이 정년, 혹은 종신으로 근무하게 해야 하고 퇴직 후 변호사를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글을 법원 내부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진정한 사법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이 장문의 게시물로 인해 법조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문 판사는 대한기독교침례회 서지방회 전도사가 되어 있다. 시무하는 교회는 ‘낮은마음교회’. 재적교인 100여명의 자그마한 교회다. 한때는 열혈 ‘사법 개혁의 전도사’로 불렸던 사람이 이제는 한 교회를 담임하는 교회 전도사가 되어 있다. 전도사는 같은 전도사지만 그 변화의 진폭이 예사롭지 않다.
무엇 때문일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법관이라는 직업은 대단한 프리미엄을 갖고 있다. 법관이라는 직업을 감싸고 있던 과거의 아우라는 많이 퇴색했다고 해도, 사회적 신뢰의 수준이 많이 하락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법관은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2004년 문 판사가 퇴직할 당시 그의 직함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였다.

 

향천사의 범종소리

문 전도사는 원래 불교를 믿었다. 아버지가 불교를 믿었고, 충남 예산의 고향 집은 백제 의자왕 때 세워진 향천사라는 절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종교심을 가득 채웠던 것은 향천사의 범종소리와 목탁소리, 그리고 아버지의 독경소리였다. 그런 그의 불교적 세계관에 처음 균열이 생긴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바로 위의 형의 죽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문 전도사로서는 가장 친한 형이었다. 서울대 진학에 실패했던 형은 시름시름 앓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떴다. 어린 마음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져 내렸다. 문 전도사가 그때 한 일은 ‘주님’이란 글자를 반복적으로 쓰는 일이었다. 비록 불교를 믿고는 있었지만,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탓이었다. 형이 살아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주님’이란 글자에 사무쳤다.

 

사법연수원에서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힘든 시기였다. 치열하게 매달렸던 사법고시에 떨어졌다. 공부 때문에 미뤄왔던 군 입대도 피할 수 없는 발등의 불이 되었다. 집안은 가난했기에 다른 돌파구를 만들기도 어려웠다. 그런 시기에 그는 ‘양서’를 읽기로 마음을 먹는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현실적인 괴로움을 극복하고 대안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때 그가 선택한 책이 ‘성경’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초기에 점진적으로 일어나던 내적 변화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면서 절정을 이룬다. 그의 표현을 빌면 ‘새벽에 엎드려 기도하면 성령이 폭포수처럼 나의 마음속에 임했다. 새벽기도를 한 날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창공을 날아오르듯 상승기류 가운데 하루 종일 살 수 있었다.’
바로 이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법복을 벗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힘이. 물론, 여기에는 현실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그에게는 몇 개의 ‘꼬리표’가 있었다. 우선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날치기로 통과시킨 노동조합법 관계 법률에 대해 대법원에 위헌 제청을 했다. 이것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법원장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법관’으로 찍히게 된다. 또한 90년대 말 그가 주장했던 사법부의 개혁은 파장은 컸지만 현실적인 벽을 넘기에는 힘이 약했다. 선구적인 주장이었지만 그 여파로 인한 내부적인 입지도 좁아졌고 그 스스로도 더 이상 자신의 역할에 의미를 잃어버렸다.

 

관악산 기슭에서

문 전도사는 법무법인 로고스를 거쳐 지금은 법무법인 민우의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낮은마음교회 담임전도사로도 사역하고 있다. 이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본인이 주도적으로 개척한 교회는 아니었다. 해오름교회(전 관악교회)의 지교회로 출발한 교회였지만, 본 교회가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해서 유지가 곤란해지자 문 전도사가 그 짐을 떠안은 것이다.
“고시촌 성경공부 모임이 모태가 됐습니다. 10여 년 전 신림교회의 협조를 얻어 고시공부 하는 사람들을 돕는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이 교회가 형성되는 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교인의 1/3은 고시생, 1/3은 변호사 일을 하면서 전도한 사람들, 1/3은 지역주민입니다.”
두 개의 사역, 이 쉽지 않은 일을 지속하는 데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문 전도사 자신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 힘드는 것도 힘드는 것이지만, 자칫 둘 다에 소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전도사는 “새벽기도만 인도할 수 있으면 그렇게 힘들 것은 없다. 젊은 시절부터 새벽기도만은 늘 지켜왔기에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문 전도사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것이었기에 힘들다기보다는 “기쁨과 감사로 다가온다”는 고백이었다.
어느 소설가는 우리의 일생을 ‘유전(流轉)’으로 설명했다. 끝없이 흐른다는 의미이다. 이 속에는 ‘변화’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그 변화의 길목에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바로 우리의 가치기준이다. 그리고 그 가치기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발생한다. ‘제2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오직 한 길만 걷는 행복한 일생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살면서 ‘하프타임’을 맞는다. 그 하프타임에서 어떤 ‘의미’를 선택하느냐는 어느 정도는 자신의 몫이다.
문 전도사는 그 선택의 순간에 ‘영적인 가치’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문 전도사의 고백처럼 “내가 베푼 것보다 받은 은혜가 더 크기 때문”이다.

김지홍 기자 pow97@iwithjes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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