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간절한 염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꿈이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기를 원하는 생명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도토리 두 알’이라는 시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산길에서 도토리 두 알을 주웠습니다.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었고, 또 한 알은 크고 윤이 났습니다. 시인은 손바닥에 놓인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보다가 문득 묻습니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시인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이 아니냐면서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지며 마치 격려하듯 말합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도토리의 보람은 참나무가 되는 데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식의 태반은 남과의 비교에서 나옵니다. ‘타인은 내게 있어 지옥’이라 했던 사르트르 의 말이 가리키는 바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주님께서 하신 일에 놀라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도토리 두 알
어느 철학자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놀라고자 하는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시를 읽다 보면 시인들의 통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을 시적 구조 속에 담아냄으로써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변화시킵니다. 시적 언어에 담기는 순간, 평범한 순간 혹은 평범한 사물은 우리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예수님도 시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하늘을 보았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 들에 핀 꽃 한 송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셨습니다. 어쩌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선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놀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기적이다
자기가 있다는 사실이 기적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사람도 기적임을 압니다. 그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기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무대에서 상처입은 사람들을 천하보다도 귀한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그 ‘귀히 여김’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그의 상처와 어둠과 가난까지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고투하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근대사에서 예수를 닮은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41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기 몸을 역사의 제단 앞에 불살라 바친 전태일이 그 사람입니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을 때 “우리도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배운 것이 없기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는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전태일이 죽은 후 대학생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특권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종교계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갈릴리 예수의 복음을 다시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은 배웠다는 사람들의 안일한 의식에 경보를 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음의 자리에서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붙들고 이렇게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노동자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그는 죽음을 통해 좁쌀만한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점점 커졌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간절한 염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꿈이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기를 원하는 생명입니다. 후줄근해 보여도 그들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욕망의 지배에 굴복하며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참 멋진 삶을 한껏 누리며 사십시오. 그리고 그 생명의 잔치에 이웃들을 초대하십시오. 그들의 가슴에 생기를 불어넣으십시오. 척박한 땅을 갈아엎고 그 속에 생명과 평화의 씨를 심으며 사십시오.
우리는 이 멋진 일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초대에 응해서 아름다운 벗들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진력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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