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복되게 하는 사람들

찬송_ 338장 성경_창 28:10~15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치는 매우 곤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뒤, 그와 함께 하여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그로 세상을 복되게 하는 사람으로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아 야곱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는 다음의 그에 대한 기록에서 그 의미를 가늠해 보게 됩니다. 그는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매우 지치고 시장한 틈을 타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흥정했고(창 25:31), 아버지 이삭이 노안으로 앞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축복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27:19~23). 야곱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곤경을 이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후에 야곱에게도 찾아왔습니다. 형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쳐 외삼촌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그에게, 라반은 결혼 첫날밤에 라헬 대신 레아를 들여보냈고(29:23~25),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지만(31:7) 제대로 항변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교활한 행위로 인한 온갖 고난을 겪고 나서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라고 부르는 것을(47:15~16) 보게 됩니다.

복은 우리의 수고나 지혜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을 복되게 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들

찬송_ 214장 성경_ 신 11:8~12

 

환경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환경은 삶을 더 풍요롭게도 하고, 여유를 갖게 하지만 열악한 환경은 때때로 생존마저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좋은 환경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그렇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은 애굽보다, 우르나 하란보다 결코 더 나은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과 가나안을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며, 발로 물을 대야 하는 애굽보다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사일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애굽은 물이 풍부하여 언제나 필요한 물을 댈 수 있지만, 가나안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바라보는 이른바 천수답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농사일을 잘 몰랐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결코 아닐 겁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인간의 수고나 노력으로 살 수 있는 곳이지만 가나안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죄는 윤리성을 갖기 전에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등지고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먹고 안 먹고의 결정권, 하고 안 하고의 결정권, 옳고 그르고의 결정권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갖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간섭 없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그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언제나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며 그 돌보심 가운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의 눈이 항상 있어야 했습니다.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언제나 풍성히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혜)이 환경이 주는 것보다 더 풍성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

찬송_ 273장 성경_ 눅 15:17; 20상

 

요 1:1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헬라어를 직역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을 향해 계셨으니’로 번역된다. ‘향한다’는 말은 ‘등진다’는 말의 반대이다. 등지는 것이 ‘떠나고, 함께 하지 않으려 하고, 거부하고, 대적하는’ 것이라면, 향하는 것은 ‘가까이 가려하고, 함께 하려 하고, 닮으려 하고, 연합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계신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등지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죄’라 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탕자 비유이다.

성경은 둘째 아들이 왜 아버지 곁을 떠나 먼 나라로 갔는지를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누구나 과거에 한 번쯤은 그런 충동을 가졌었기에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아버지를 등진 것이 되었다. 아버지를 떠난다고 모두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간섭 없이(그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잃어버리게 하는 데도) 살려 했던 인간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혜도, 능력도, 의지도 부족하고, 또 우리를 실패케 하려는 악(사단)의 세력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그 실패가, 참혹한 그 실패가 아버지 곁에(그 돌보심 아래) 있을 때를 생각나게 한 것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 자신보다 아버지가 옳았음을, 그 돌보심이 필요함을,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려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나아갔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 ‘믿음’ 또는 ‘기도’(아버지께 받아주기를 요청하는 것이기에)라고 한다. 곧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하고, 하나님 편에 서려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려하고, 하나님을 닮으려 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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