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건국대 교육공학과 오성삼 교수

은은한 녹차향이 실내를 떠돌았다. 오성삼 교수(건국대 교육공학과)는 이제 정년을 1년 남짓 남겨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들은 은백의 머리칼로, 깊고 굵은 눈가의 주름살로 접혀 있었다. 퇴직하면 남은 시간은 글을 쓰는 데 바치고 싶다고 말하는 오 교수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오 교수는 어느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어떻게 그 자신이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교육 이야기부터 꺼냈다. 평생을 교육학자로 살아온 노(老) 교수는 우리 사회의 교육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한 탓이었다.

 

다양성의 교육

오 교수의 교육론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원리를 중시하는 루소나 페스탈로치의 교육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품성과 인성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핵심인 것이다. 여기에 오 교수는 한 가지 요소를 더 첨가한다. 바로 ‘창조의 섭리’다.

오 교수는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양성’이라고 본다. 다양한 사물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도록 만드셨다. 이러한 원리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달란트를 허락하셨고, 그런 달란트를 통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셨다.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이 그 증거다.

오 교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완벽하게’ 무너지는 지점이 한국의 교육 현실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경쟁을 통한 서열화다. 남을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결코 ‘대한민국 1%’가 될 수 없다. 인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계급사회를 지향한다.

오 교수 자신도 이런 냉혹하고 치열한 현실에서 ‘자연의 원리’나 ‘창조 섭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낭만적이고 이상적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만이라도 ‘올바른 교육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오 교수의 주장이다. 관점을 바꾸면 현실은 변화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창의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다양성이야말로 모든 창의성의 근본이다. 하지만 남을 밟고 죽어라 1등을 향해 달려가는 경쟁 구조는 공멸로 치달을 뿐이다.  

 

점심시간 90분

이러한 오 교수의 교육론이 일정 부분 교육 현장에 적용된 시기가 있었다. 2004년 8월 오 교수는 건국대 부속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헌데, 당시 오 교수는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국제교육진흥원장이었다. 해외 한인 자녀들의 교육 문제나 국비 장학생을 관리하는 등 많은 예산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의 장 자리를 버리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오 교수를 보고 “미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 교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교육부 관료가 아니라 교육자라고 본 탓이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교장이 된 오 교수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이 ‘뜨악’해 할 만한 몇 가지 시도를 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학생들의 점심시간을 ‘90’분으로 늘려 논 것이다. 90분 가운데 30분은 식사시간, 60분은 자유 시간이었다. 대학 입시를 위해 머리 터지게 공부해야 할 시점에 60분의 자유 시간이란 것은 너무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교사들뿐만 아니라 학생 자신과 학부모들도 당황했다.

오 교수가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학생들에게 ‘자기성찰’의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공부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건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건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 교수의 조치는 초기에는 얼마간의 혼란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현명하게도 그 시간을 기도나 묵상의 시간으로, 혹은 창의적 발상의 시간으로, 공부로 억눌린 자신을 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활용했다.

 

늘 비가 내렸던 어린 시절

오 교수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이다. 오 교수의 기억에 그의 어린 시절은 늘 비가 내리던 우기(雨期)였다. 그 불행의 출발점은 바로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어린 나이의 자녀들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오 교수에게 물려준 유산은 물에 젖은 성경책과 찬송가 한 권이었다. 어머니는 아들 셋을 재봉틀에 의지해 홀로 키웠다. 그러니 이 가정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힘들고 어려운 삶속에서도 미명이면 일어나 단정한 모습으로 새벽기도를 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녀들의 기억에 강렬한 인상으로 자리 잡는다.

오 교수의 중학교 입학 성적은 응시생 122명 가운데 121등. 전체 모집 인원이 120명이었지만, 보결로 운 좋게 중학교를 들어갈 정도로 형편없는 성적이었다. 어찌어찌 해서 대학을 들어가고 등록금이 없어 학교 교문 앞에서 입학시험 문제지를 팔고, 학교 건물에서 새우잠을 자며, 영양실조로 늑막염에 걸려 ROTC 임관을 하지 못한다.

유학을 떠나기까지, 또 유학 이후 한동안 오 교수의 삶을 묘사해줄 수 있는 단어는 아마도 ‘구구절절’일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혹독한 가난의 한 시절을, 또 그로 인한 설움과 인내의 시간들을 어찌 구구절절 다 묘사할 수 있겠는가? 아마 흔히 말하듯 그 이야기만으로도 ‘소설책 5권 분량’일 것이다.

 

희망의 증거

중요한 것은 그런 고난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의 문제이다. 오 교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제대로 학교 수업을 듣지 않고 떠돌아다니던 시간을 자기성찰의 시간들로 보고 있다. 실제로 오 교수는 그때 어린나이였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런 체험이 나중에 그가 건국대 부속고등학교장 시절에는 ‘점심시간 90분’이라는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교육실험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오 교수는 사실 자신의 힘으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경제적인 뒷받침이 전혀 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대학교수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의 도움이었다. 월드비전과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은 그가 지독한 가난을 딛고 계속해서 학자의 길을 향해 걸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끝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에게 주어진 한줄기 빛이었다.

오 교수는 이런 도움의 손길에 대한 감사를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스스로를 ‘늘 빚진 자’로 표현하는 오 교수는 정수장학회로부터 받았던 장학금을 나중에 되갚았다. 물론 이것은 빚을 갚는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이 어려울 때 받았던 도움을 기억하고 또 다른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되갚음이지만, 오 교수의 행동은 이후 정수장학금을 받았던 다른 사람들이 장학금을 되갚는 운동의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자신이 진 빚을 되갚는 오 교수의 행위는 외국인 근로자 일요대학에서 정점을 이룬다. 96년 아직 외국인 근로자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고 어색하던 시절, 오 교수는 건국대 평생교육원 안에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일요대학을 개설한다. 이 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대단히 무모한 시도로 비쳐졌다.

일요대학 개설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오 교수에게 당시 건국대 총장은 “좋은 생각인데, 그럼 돈은 누가 낼 겁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오 교수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강좌를 무료로 운영하고 점심식사까지 제공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돈을 어디서 가져올 것이냐고 묻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물음이었다. 물론, 학생들의 학비를 여기에 투입할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깔려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오 교수는 “하늘이 감동하고 인간이 감동하는 일은 하늘이 한다”고 대답한다. 기독교적으로 단어를 바꾸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은 하나님이 진행시켜 나가신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일요대학은 언론을 통해 주변에 알려지면서 후원금이 답지해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당시 가장 먼저 무료로 강의를 해주겠다고 나선 사람은 박노자 교수였다.

비전이 이끄는 삶

연구실의 창문으로 늦가을의 맑은 햇살이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창밖은 온통 노란 은행잎으로 물들어 있었다. 녹차는 다 식었다. 노 교수의 이야기는 결말을 향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단선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부분과 이야기 되어질 수 없는 부분이 겹치고, 시대상황과 개인적 편차라는 변수들이 개입한다.

하지만 핵심은 늘 비슷하다. 바로 오 교수의 경우 그의 삶에 있어 신앙과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느냐에 관한 부분이다. 오 교수는 돈이 없어 대학을 가기 힘든 순간에도 나는 반드시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런 근거 없는 확신과 자신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오 교수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가슴 저 밑바닥 깊은 곳에 그런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확신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이었다. 오 교수의 부친은 뿌리 깊은 신앙인이었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이었다. 그런 신앙이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유산은 아들로 하여금 스스로 ‘희망의 증거’가 되길 고백하게 만들었다.

오 교수는 자신의 첫 책 제목을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라고 붙였다. 비는 아무리 거세도 결국은 그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희망은 고난 속에서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오 교수는 그런 결코 무너질 수 없는 희망과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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