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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요”
삶의 중심은 바로 자신…상실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
[118호] 2011년 10월 23일 (일) 문지현 @

상호 씨의 아버지는 상호 씨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이해하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지만, 11살에 불과한 어린 상호 씨에게는 더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겪어내며 어머니와 누나, 상호 씨 이렇게 셋은 그야말로 참 열심히 살았다. 셋 다 힘들었지만, 상호 씨가 져야 했던 짐은 더 컸다. 자기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힘드냐고 물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었다. 슬픔을 누른 채 그는 어머니를 위해 공부하고, 어머니를 위해 직장을 다녔다. 어머니에게 삶의 희망을 주기 위해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하고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상호 씨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 기대하는 어머니를 위해 살았다.

 

 

타인을 위한 삶

불행히도 이러한 상호 씨에게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존재한다.

첫째, 아주 높은 이상(理想)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을 갖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아무 이상도 없이 사는 사람이 평면적인 삶을 산다면,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입체적인 삶을 사는 셈이다. 문제가 되는 건 이상 자체가 아니라 그 이상이 ‘아주 높은’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훌륭한 선생님이나 좋은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상에 해당한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다 모범이 되는 완전한 선생님’이나, ‘자식의 요구만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는 완벽한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이런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이상을 자신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꼽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태껏 경주하던 그 노력의 에너지가 푹 꺼지면서 그대로 털썩 넘어져 버리게 된다. 상호 씨의 높은 이상은 자신의 개인적인 어려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어서서 그야말로 보란 듯이 멋지게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자기 삶도 일으킬뿐더러 누나와 어머니의 삶도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첫 번째 함정이 두 번째 함정과 연결된다.

두 번째 함정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이다. 자신이 없고 타인만을 위한 삶만 남아있다. 남편이나 남자친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신을 챙기지 않다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여자들이나, 자식만 바라보다가 자신의 삶은 다 없어진 부모들이 그 예이다. 상호 씨의 경우는 그 ‘누군가’가 어머니에 해당됐다. 아들이 잘하려고 노력하면 뿌듯하기야 하겠지만, 남편을 자살로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고통은 아들의 노력만으로 무마되기에는 너무 상처가 깊다. 상호 씨는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어머니의 행복)을 어떻게든 가능하게 해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면서, 스스로의 마음은 돌아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만 바라보면서 살아왔다.

이제 서른이 된 상호 씨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다니던 직장에서 경험한 스트레스는 그 자체로는 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상호 씨에게는 낭떠러지 끝에서 떠미는 역할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스트레스인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받아들일 때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이면 그걸로 타격은 충분하다.

 

 

상실의 고통

슬픔과 우울은 상실에서 시작된다. 어떤 상실이든 아프지 않은 것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일은 만 11세가 되기 전에 부모 중 한 명을 잃는 것과 배우자를 잃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아내를 암으로 잃은 뒤에 <헤아려 본 슬픔>을 썼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무섭지는 않으나, 그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 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진다. 나는 연신 침을 삼킨다.”

부모를 잃는 것은 사람이 감당해야 할 심리적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나이에 부모를 잃으면 그 당시에 바로 우울을 앓지 않는다 해도 더 나이가 들었을 때 병으로서의 우울증을 앓을 가능성이 높다. 뒤늦게 우울증을 앓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뇌의 생리에 변화가 와서 그럴 거라는 가설이 있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상실이 알게 모르게 감정을 주관하는 뇌 안의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뇌의 구조 자체에 변화를 일으켜서 결국에는 외부적 자극 없이도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상호 씨가 병원을 찾게 된 이유는 극심한 불면증과 더불어 설명할 수 없는 짜증 때문이었다. 다니던 직장이 자신에게 잘 안 맞아서 그런가 보다 싶어서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새 직장으로 옮겼지만, 이전보다도 더 헤맸고 적응하기도 더 어려웠다. 진료실을 찾은 상호 씨에게 가족에 대해 물어보자 바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화를 내는 표정인가 했는데 곧 억지로 눈물을 참는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진료실이라 하더라도 눈물 흘리거나 슬퍼하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삼십 대 남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에게서 어린 상호 씨가 감당했어야 할 정신적 고통의 무게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힘들면 힘든대로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슬픔과 우울의 문제에서 상실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실을 회복할 수 없다면-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상호 씨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삶의 방향이라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나친 고통을 가져오는 우울로 이어지는 길에서 돌아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외부를 향하고 있던 시선은 우리 자신을 향하게 된다. 우울이 깊어지면 이 시선은 완전히 내부로만 향한 채 바깥에서 빛나고 있는 햇빛을 잊게 만든다. 때로는 자기 안을 들여다보면서 정리할 필요도 있지만, 그 안에만 계속 머무른 채 꼼짝도 하지 않기에는 서른 살의 상호 씨 인생이 너무 아깝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가 현재 빠져있는 함정에서 어떻게든 빠져 나오는 일이다.

어려울 때면 굳이 꿋꿋하지 않아도 괜찮다. 보란 듯이 멋지게 살지 않아도 된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괜찮다. 너무 오래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겠지만, 바로 이 시간에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지도 다시 한 번 점검하면 된다. 삶의 방향이 다른 사람들에게만 향해 있는 바람에 우울증으로 주저앉을 정도라면, 인생의 궤도를 먼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방향으로 수정을 하는 쪽이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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