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소유의 결말은 허망…만족 아는 것이 참 행복의 비밀

전도서를 보면 솔로몬이 삶을 찾는 과정 중에 그가 소유에서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많이 소유하면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소유에 집중했다. 그는 당대에 가장 많은 것을 소유했다. 그는 집들을 소유했다. 그가 소유한 집이 몇 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처와 첩들의 수가 1,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집들의 수도 그에 상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처와 첩들을 합숙소에서 생활하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소유를 많이 하면 거기에 삶이 있을 줄 알았다. 삶의 의미와 이유가 그 가운데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것을 소유한 후에 그가 한 말은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이다. 소유에 삶이, 행복이, 만족이 없었다.

‘신(神) 소유’
성경에 있는 솔로몬의 이런 고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 소유를 좋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무소유가 이상적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집 한 채, 자동차 한 대를 소유하는 것도 죄악시하고 소유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경우다. 전세나 리스나 렌트 제도를 활용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소유하지 않으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취향에 의해 이렇게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다면 수정이 필요하다.
소유와 관련해서 성경적인 소유관은 ‘신(神) 소유’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소유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신 소유를 인정하면 우리는 전(全) 소유자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 전부가 우리 것이 된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서도 하나님 앞으로는 등기가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소유권 등기를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든지 소유권 등기를 해야 한다. 기부 채납을 해서 국가 앞으로 등기하든, 학교나 재단에 기증을 해서 학교나 재단 앞으로 하든, 교회에 헌금을 해서 교회 앞으로 하든, 자신 앞으로 하든, 자녀나 가족 앞으로 하든, 가난한 이들 앞으로 하든, 우리는 누구 앞으로라도 소유권 등기를 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소유에는 왜 만족이 없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 이름으로 등기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둘 다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혹이라도 하나님의 것을 내 이름으로 소유권 등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그 어떤 것도 내 이름으로 소유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내 이름으로 된 것은 다 내 것이라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앞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소유하며 살고 있다. 이미 우리 앞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있고, 앞으로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소유에는 행복이 없다, 소유에는 만족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은 혼란스럽다. 집 하나를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저축하는 것이, 차 한 대를 구입하기 위해 열심히 적금을 들고 있는 것이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그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 해 아래서 무익한 일인가? 실제 그렇게 준비해서 집을 마련하고, 차를 마련했더니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럽던데…. 그런데 왜 성경은 소유에는 만족이 없다고 하는가? 왜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다고 하는가?

‘과소유’의 오류
이번에 순장들과 ‘삶을 찾아서’를 공부하는 중에 하나님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선물 하나를 주셨다. 그것은 ‘과소유’라는 단어다.
솔로몬이 소유에 만족이 없었고, 소유에 행복이 없었던 것은 그것이 과소유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과소유했다. 한 명의 아내를 소유하는 것이 적당한데 그는 1,000명을 소유했다. 집들과 은?금도 과소유했다.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만족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그의 가정이 틀렸던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신소유를 인정하고 전소유자로 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제도를 따라 하나님의 것을 우리 앞으로 소유할 때, 그 소유를 적당하게 하라는 것이다. 과소유하지 말고. 적당한 소유에는 만족이 있다. 그러나 과소유에는 만족이 없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만큼 소유해야 한다. 그것이 배우자라면 한 명이면 족하다. 두 명, 열 명, 백 명이면 사람의 계산으로는 그만큼 만족이 배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허전하다. 허망하다. 왜 그럴까? 과소유이기 때문이다. 은을 사용해야 하는데, 은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소유는 적당한가? 과소유는 아닌가? 행복하기를 원하면, 만족하기를 원하면 적당한 소유, 그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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