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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있어야 할 자리
문지현의 감정이 꽃피는 순간
[114호] 2011년 09월 04일 (일) 문지현 @


분노는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의 한 축이라고 했다. 살면서 슬픈 감정을 많이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슬퍼야 할 때 슬퍼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다. 소중한 사람의 장례식에서 깔깔대며 웃는 사람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노 역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한다. 화가 날만 한 자리에서 화를 못 느끼거나, 화를 내야 하는 자리에서 화를 내지 못한다면 이 역시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 화내지 못하는 사람

이정 씨와 현구 씨는 친구 사이였다. 현구 씨는 어릴 적 실수처럼 일찍 했던 결혼이 아내의 바람으로 끝나는 바람에 상처가 많았다. 이정 씨는 상처 입은 친구를 사랑으로 돌봐 주었다. 가장 깊은 치유를 준다고 생각했기에 복음도 전했다. 현구 씨는 신앙을 가지면서 놀랍게 회복되었고, 교회에서 새로운 자매를 만나며 인생의 새 페이지를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둘은 함께 일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잘 풀리는 것 같던 사업은 머지않아 내리막길을 탔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사채에 손을 대면서 문제는 더 커졌고 마침내 투자자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사태까지 맞게 되었다. 둘이 힘을 합쳐도 이겨내기 쉽지 않은 상황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구 씨가 자기 역시 속았다며 이정 씨를 고소함으로 발뺌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사람, 화가 나지 않는다. 이 상황을 생각하면 펄펄 뛰며 화를 내도 시원치 않은 판인데 그저 막연하게 느껴지는 슬픔과 먹먹함만 경험할 뿐이다.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에 휘말리고 엉킨 채로, 반쯤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낯설고 초라한 곳에서 한숨도 못 이룬 채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다 깨었다. 꿈에서 이정 씨는 자기에게 배신을 안겨준 현구 씨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꿈을 분석하지 않아도 꿈의 메시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속 분노는 등 돌린 친구를 향해 살의를 발하고 있었다. 

분노를 못 느낀다고 해서 마음속에 분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분하여 아우를 쳐 죽이던’ 가인 이상의 분노가 들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이 분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왜냐고? 어려서부터 우리들은 화를 내면 혼났다. 아이가 자신에게 화내는 걸 잘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부모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분노의 표현은 권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는 걸 견디지 못하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가 화를 내면 찍어 눌렀다, 자신이 더 화를 내면서. 그러면서 아이들은, 화내는 건 유치하고 바보 같은 일이라고 배운다. 분노가 겉으로 드러난다는 건 자기 조절을 못 하는 사람이자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분노를 억누른다.

그렇다고 느끼는 대로 분노를 표현하는 게 건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신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억압과 억제라는 것이 있다. 억압(repression)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의식에 이르기도 전에 눌러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신경증적인 방어기제에 속한다. 억제(suppression)는 의식 속으로 들어온 충동이나 갈등을 의지적으로 견뎌내는 것을 의미하고, 성숙한 방어기제에 속한다. 성숙하게 분노하는 사람이란 분노를 아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분노를 경험하되 이를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이다.

# 억눌린 분노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나

그에 비해 분노를 억압해 버리는 사람은 그 감정을 너무 눌러 버리는 바람에 그 화가 내게 미치는 영향을 모른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해서 뚜껑 덮어 놓은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는 속에서 끓어오르게 되는데, 주변을 불사르지 못하면 하다못해 자기 자신의 속이라도 좀먹어 들어간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는 그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고 마침내 모든 일상생활이 분노와 연관된 것으로 바뀐다.

이정 씨가 보여주는 모습은 분노의 억압이다. 어쩌면 그는 신앙인으로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절제하고 있노라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험하지도 않은 분노를 그냥 눌러 버리는 건 성숙한 억제가 아닌 억압이다.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며 하룻밤 잠을 설치는 데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느끼지 못한 분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소위 ‘화병’이라고 이야기하는, 신체화 증상을 주로 보이는 감정의 질병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자기 안에 눌러 둔 분노의 퇴적물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짜증을 연발하며 자기 삶을 낭비할 수도 있다. 때로는 묻어두고 싶었던 분노가 ‘수동적 분노’의 형태로 변신에 성공한 채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약물 남용이나 과식, 과수면 같은 것은 수동적 분노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분노를 자신에게 푸는 셈이다. 꼭 이렇게 극단적일 필요까지는 없어도 수동적 분노는 생각보다 흔하다. 몹시 화가 났을 때 말을 안 해 버리거나, 뾰로통하게 삐쳐 버리는 것도 수동적 분노에 속한다.

이정 씨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누가 뭐라 해도 그 상황 속에서 제일 힘든 건 이정 씨 자신이다. 화, 충분히 날 만한 상황이다. 어차피 이정 씨 성격상 현구 씨 집 앞에 숨어 있다가 그를 때려 주거나, 맞고소해서 괴롭힐 만한 사람도 못 되니 차라리 나 정말 화가 났다고 해도 괜찮다. 누구에게? 이정 씨 주변에는 그의 감정의 결들을 받아 줄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자신이 화가 났다고, 현구 씨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때리면 아픔을 느끼는 게 당연하듯, 상처받을 때 화가 나도 괜찮다고 자신에게 얘기를 해주면 좋겠다. 분노를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다.

뚜껑을 꽉 닫은 채로 내버려 두면 내면이 분노의 독으로 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를 풀어내지 않고 느끼지도 못한 채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분노에 매인 죄수가 되어 버린다.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한 꿈을 꾼 날 아침에 이정 씨가 느꼈을 감정을 상상해 보라. 피가 마르는 건 현구 씨가 아닌 이정 씨 본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의 감정이 나타나는 곳에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분노이든, 느끼지 못한 채 눌러놓은 분노이든- 가장 상처받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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