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중요함을 또 깨닫습니다. 어느 공동체나 직장이나 교회나 동네나... 생명력 있는 한 사람 말입니다. 내가 선 자리에서 어떤 생각으로 무얼 하느냐에 따라 내 이웃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밀알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그늘이 되기도 하고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눈이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향기는 도처에서 풍기는 악취에 범벅이 되고, 튼실하게 자란 나무그늘도 탐욕의 톱에 잘려나가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동행의 거리에는 탐욕과 거리가 먼 동행인들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독자들을 마중 나오는 마음은 늘 감사와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이 땅을 떠나게 되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이 땅의 일들에 기를 쓰고 욕심을 부리곤 합니다. ‘탐욕’ 말입니다. 탐욕과 가까운 단어가 생각납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 탐욕의 사람들에게 겉 사람은 사람인데 속사람이 사람같지 않다고 말하면 아마도 몰매를 맞을 게 뻔합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자문해보면 자신있게 “탐욕 없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일까 싶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범죄행위는 탐욕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탐심을 가지고 돈을 따라다니는 사람의 마음이 범죄를 만드니 말입니다. “어떤 종류의 악이나 탐욕도 틈타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5장)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을 지표로 삼는다면 욕심을 덜 부릴 것 같습니다. 간디도 그 옛날에 이미 “이 지구가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탐욕을 채우기에는 충분치 못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을 지나 간디의 시대도 지나, 지금까지 그 ‘탐욕’이란 물건은 계속 독초와 같이 자랐고,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 아래 더욱 무성하게 자란 게 탐욕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도 그 ‘탐욕’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것을 보는 이들은 분노합니다.
여기, 산자락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 산을 즐기며 가꾸도록 교인들을 인도하며 평생 생명?생태목회를 한 노 목회자의 이야기, 자신의 달란트로 한 나라에 교회음악의 터를 놓는 데 삶을 바치고 있는 가녀린 독신 선교사 이야기, 어렵사리 삶을 꾸려가는 가난한 동네에 폭탄맞듯 타버리고 폭우로 쓸려가고 무너진 집들을 세워주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 강단 위에서만 아니라 삶으로 환경운동하며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는 노 교수님의 이야기... 이렇게 꾸려 독자 여러분을 ‘마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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