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대가를 외면하는 이 시대의 벗들에게


쟌느는 어머니가 난민을 몰아내고 학살한 민족주의당의 지도자를 암살한 뒤 감옥에서 15년을 갇혀 있었으며, 갖은 고문과 학대 속에서도 굴하지 않아 “노래하는 여인”(la femme qui chante)으로 불렸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을린 사랑>(Incendies), 루브나 아자발(나왈 마르완), 멜리사 드소르모-풀랭(쟌느 마르완), 막심 고데트(시몽 마르완) 주연 / 드니 빌뇌브 감독, 2010년작. 2011.7.21.개봉
“시신은 관에 넣지 말고 옷도 입히지 말아라. 그냥 묻되 누이지 말고 엎어서 묻어라. 세상을 등질 수 있게. 그리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이름을 새기지도 말아라. 약속이 지켜지면 그때 가서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새겨라. 햇빛 아래에.”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유언은 쌍둥이 남매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생전의 어머니에게서 살가운 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만큼, 예사롭지 않은 유언은 어머니를 더 낯설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봉함된 편지 두 통을 각자 아버지와 형에게 전해야 한다는 유언도 있었습니다. 이제 남매는 제각기 넘겨받은 편지를 들고 자기에게 주어진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쟌느는 어머니가 남긴 오래된 여권과 낡은 증명사진 한 장을 들고 어머니의 과거 속으로 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어머니 나왈의 과거와 딸 쟌느의 현재가 상호 교차하고 겹치면서 불가해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미스터리극처럼 느껴집니다.

어머니의 조국은 중동의 어느 가상 국가입니다. 기독교와 무슬림 사이에 증오와 살육으로 점철된 오랜 갈등으로 깊은 내상(內傷)을 입은 나라입니다. 분쟁의 와중에 기독교 마을 데롬의 처녀 나왈은 무슬림 난민 청년 와합과 사랑하는 사이로, 함께 야반도주를 하려다 발각돼 와합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때 나왈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는데, 출산 때까지 숨어 지내다 때가 되어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는 고아원에 보내기로 결정되어 있었고, 나왈의 어머니는 아이의 발뒤꿈치에 문신을 새겨 넣습니다. 나왈은 아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품에 안고 말합니다. “너를 반드시 찾을 거야. 꼭 너를 다시 찾아갈게, 아가야. 사랑한다.”

아이가 고아원으로 떠난 뒤 나왈도 고향을 떠나 도시의 삼촌집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분쟁이 격화되고 전란(incendie)의 기운이 싹트자, 나왈은 어느 고아원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의 아들을 찾으러 나섭니다. 전란 속에서 아들을 찾아가는 나왈의 걸음은 벼랑 위를 걷는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나왈의 행로 위에 쟌느의 여정이 겹쳐집니다.

쟌느는 어머니가 난민을 몰아내고 학살한 민족주의당의 지도자를 암살한 뒤 감옥에서 15년을 갇혀 있었으며, 갖은 고문과 학대 속에서도 굴하지 않아 “노래하는 여인”(la femme qui chante)으로 불렸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는 법이지요.”
13년이나 어머니를 감시했다는 한 남자의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충격적인 진실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쟌느는 어머니의 과거 행적을 계속 따라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가 수감 중 고문기술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쌍둥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고통과 충격 속에서 쟌느는 멀리 퀘벡에 있는 시몽을 찾고, 쟌느의 전화를 받은 시몽은 어머니의 유언 공증인과 함께 현지로 달려갑니다. 이제부터는 시몽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어머니가 처녀 적 낳은 자신의 형 니하드를 찾아가는 그의 여정이 종착지에 이르고, 마침내 시몽과 쟌느는 경악을 금치 못할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어머니가 남긴 두 통의 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남매가 고통스럽게 깨닫는 순간은 객석에 있던 제게도 숨이 멎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영화 속 진실이 뇌리에 남아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과연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운명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나왈을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세상에 등을 돌린 채 묻어달라 한 그 진실, 쟌느와 시몽이 어머니의 과거를 거슬러 밟아가는 여정의 끝에 만난 그 잔인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영화관을 나서며 문득 저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가 생각났습니다. 오이디푸스나 그의 딸이자 누이인 안티고네가 그렇듯 우리도 크고 작은 인생의 전란에 그을린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산 자의 땅’ 위에서는 어느 누구도 행복만 누릴 수 없으며 아무도 불행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내전이 낳은 비극적 운명 속에서 나왈의 인생은 하나의 작은 파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목도한 잔인한 진실 앞에서 나왈은 모든 것을 외면하고 부인하면서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꺼이 진실의 대가를 치르는 쪽을 택했습니다. 마치 오이디푸스 왕이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것처럼 나왈은 자기 몸과 영혼, 자신의 전 생애가 발가벗는 쪽을 택합니다.

확실히 “때로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진실의 고통을 통과하지 않는 한 참된 안식은 없다는 사실을, 나왈의 삶은 울림 깊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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