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처럼 길어올린 '그들'의 목소리


냉소와 우울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세상에서 문득 참 사람의 향기를 맡을 때, 마치 숲속에 든 것 같은 청량함을 느낀다. 여기, 인간의 등불을 밝힌 이들이 있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마땅히 가야 할 길 묵묵히 걷는 이들, 그들의 삶을 엿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냉소와 우울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세상에서 문득 참 사람의 향기를 맡을 때, 마치 숲속에 든 것 같은 청량함을 느낀다. 여기, 인간의 등불을 밝힌 이들이 있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마땅히 가야 할 길 묵묵히 걷는 이들, 그들의 삶을 엿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김기석 목사(청파교회)는 책 <그 사람에게 가는 길>을 그렇게 읽는다.
이르러야 할 목표가 멀고 고단할 때, 때로는 그 목표가 거대하여 겨우 나 한 사람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으로 절망할 때, 우리는 어둠을 건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인내하며 한 걸음씩 전진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마땅히 품어야 할 목표를 품고 살더라도 때로는 외로움에 쩔쩔매며, 추운 밤을 지나는 듯한 두려움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야 할 존재인 줄 알면서도 짓누르는 그 어둠의 사위에 주눅 들어 심장을 식히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장대한 벽이라도 넘어서는 담쟁이처럼 ‘더불어 함께’ 손잡을 동지들만 ‘거기’ 자리하고 있다면 판도는 달라지는 법이다.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거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누군가와 함께 손잡고 이 시간을 견뎌내며 살아내려는 의지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거기 있다. 그들 중 몇 분의 목소리를 우물처럼 길어 올렸다. 이 찬 물을 마시고 정신을 바짝 깨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01. 공지영_소설가

회심하고 보니 주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미국에 살고 있던 언니와 상의했고, 당시 언니가 다니던 뉴저지 길벗교회 김민웅 목사님을 소개받았다. 국제전화를 했고, 생전 모르던 목사님과의 통화에서 그는 마구 울었다.

“왜 이렇게 우냐고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한테 너무 미안해서 운다고 그랬거든요. 진짜 너무너무 미안했어요. 그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지영 씨, 지난 18년이 지영 씨에게는 미안하고 부끄럽겠지만 나중에 보면 그 18년도 다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러셔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아, 하나님 믿는 사람은 남을 위로할 때도 참 이쁜 말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정말로 그 시간이 축복이었음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시간이 없었으면 이렇게 돌아올 수 없었을 테니까.
“진실로 인간은 어떤 아픔을 통해서 인생의 쾌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고,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된 자’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큰 기쁨이란 어디서나 큰 고통을 겪은 후에야 경험됩니다.”


02. 류연복_판화가

류 화백의 작품은 대작일수록 그 섬세함과 웅장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품도 많이 하기는 하지만, 요즘 관심을 갖고 하는 작업은 작년 아버지와 여행하고 돌아온 금강산 전경이다. 밑그림은 그려놓았고, 이제 칼끝으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웬일인지 칼이 잘 안 들고, 눈이 침침해져서 작업하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칼이 잘 안 들어 칼을 갈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갈아야 하는데 갈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 눈이 침침한 것은 가까운 것만 보지 말고 멀리 넓은 것을 보라는 의미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듯해 자숙하고 있습니다.”

류 화백이 나무결을 쓰다듬은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이 그의 판화를 보면서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을 때 그는 어느 책에서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다.

“판이 될 만한 나무로 자라는 데 삼사십 년, 판으로 켜서 말리는 데 이삼 년, 대패질하고 사포로 문지르고 새기는 것까지 합하면…. 이제 여기에 한 세월을 더 보태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눈에 뜨여서 내게로 온 그 물(物)들의 한 세월을 말이지요.”

03. 권정생_동화작가

선생님은 유언장을 두 번 쓰셨지요.

돌아가시기 두 달 전 쯤,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입원했을 때입니다. 뭉툭한 송곳으로 찌르는 고통에 1초도 참기 힘들어 끝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니 하나님께 기도해달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리고 북쪽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남은 돈을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프신 중에도 우리들에게 제발 그만 미워하고 그만 싸우고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하라고 하셨지요. 중동, 아프리카, 티벳 아이들까지 걱정하셨어요.

그 전인 2005년 5월, 아프시지 않을 때 쓰신 것도 있으시죠. 거기엔 유언장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며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 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 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04. 장영희_영문학자

시험 이야기로 돌아와서 박사과정 시험의 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선생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니까요. 그 당시는 서강대학교 박사과정이 없어 선생님은 학교와 가까운 대학교에서 오전에 필답시험을 보았습니다.

“오후에 면접시험을 보는데, 들어가니까 선생님들 몇 분이 앉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의자에 앉으려고 그러는데, 안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 우리는 학부에서도 장애인은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음, 근데 그 말이 너무나 나한테 용기를 줬어요. 아, 그러면 내가 여기서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겠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서면 더 용감해지거든요. 바로 그날 토플 책을 샀어요. 그날부터 공부해 가지고 그 다음해 장학금 받아 미국 뉴욕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선생님이 척추암을 치료하기 위해 연재하던 글을 끝내면서 발표한 글이 생각납니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05. 문익환_목사

민중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 한 번 열지 않으며 거동조차 하지 않는 무수한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는 하나님이 외치라는 소리만 있으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토해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미 그 안에 십자가의 죽음과 삶을 품고 있는 그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으며 죽기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으니 무엇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그가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예언자 정신의 삶과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그 말씀을 대언할 뿐이라는데, 실로 무얼 가지고 그를 꺾을 수 있었겠는가.

06. 전우익_농부

사진을 촬영하려는데 선생은 얼른 또 한마디를 거든다.
“한 장만 찍으소. 필름도 아껴야지. 한 장만 찍는다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찍을 수도 없으니 더 잘 찍을 수도 있을 텐데…. 왜들 그렇게 함부로 마구 쓰는지 모르겠어요. 죄지. 과분하게 사는 건 다 죄야.”

…죄 덜 짓고 착하게 살려는 삶, 선생에게 이 막연한 문구는 진리와 다름없다. 진리는 삶을 통해 실험되어야 한다. 간디가 그의 자서전을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 붙였듯이 선생에게도 삶이란 곧 실험이다. 살고 또 살아서 강 저편 대안에 이르는 것이며, 이런 힘겨운 과정을 통해 대안이 만들어지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보지 않은 채 말한다. 선생은 누구를 만나든 ‘살아보라’고 가르친다. 꾸지람 같은 글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자면 그 내용만큼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과연 몇 사람이 자진해서 고통스런 길로 접어들겠어요?”

…선생은 책을 읽으며 머리로 배우기보다 자연을 묵상하며 몸으로 배우는 편을 택했다. 이신작칙(以身作則)이라고, 곧 몸으로 규칙을 만드는 삶이다. 책도 없고 이웃도 없을 때 궁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몸으로 문제와 부딪치는 길 뿐이듯, 그렇게 배워온 삶이다. 변함없는 스승은 풀이고 나무고 산이고 하늘이다. 변화무쌍하면서 고정불변한 산을 보면서 선생은 사람의 길을 배운다. 사계절이 오고가며 뿌리는, 그 매섭고 가혹한 변화의 원리를 통해 또 사람의 됨됨이를 배운다.

정리=박명철 기자

 

<그 사람에게 가는 길>
기독교사상 엮음,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기독교사상>이 2003년부터 2010년까지 8년 동안 매호 선정한 표지이야기의 주인공들 가운데 24인을 뽑아서 엮은 책이다. 공지영, 류연복, 강은교, 권정생, 이건용, 황동규, 최종태, 장영희, 홍성훈, 김병종, 문익환, 유동식, 안요한, 강원용, 안병무, 민영진, 조화순, 이소선, 황대권, 김동수, 문성희, 전우익, 원경선, 홍순명 등 우리 시대를 큰 걸음으로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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