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길목


시골에 내려온 지 1년이 된 1998년 5월. 학교에서 돌아오던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간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목사님 내외는 한줌 재로 변한 아들을 바다에 뿌리며 울고 또 울었다.


강원도 삼척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임원항이 나온다. 임원 1리와 2리 쪽은 항구를 끼고 있고 3리 쪽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주민이 1800명 정도인 이곳에 세 개의 교회가 있다. 각각 40명, 30명, 15명 모인다. 15명이 모이는 교회가 임원3리에 있는 감사교회다.

감사교회에 도착하니 김창수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 셋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얼마 전까지 강릉에서 목회하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시골로 간, 김 목사님 손을 잡아 주었으면 해서 월요일 오후 세 시가 넘어 집에서 출발했다. 국내전도부장 집사님과 아내와 막내딸이 동행했다. 김 목사님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슈퍼에서 장을 봐서 전해드리고 집에 오니 새벽 세 시였다.

김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감사교회의 탄생 이야기는 이렇다. 서울에 계시던 어느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하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오셨다. 그는 1년 만에 아들을 교통사고로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내고 말았으며, 아들 목숨 값으로 받은 보상금을 모두 들여서 감사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이 목사님은 아직도 감사교회에서 20분 떨어진 부광리 부광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며, 이상도 목사님이라고 한다. 이튿날 나는 또 다시 강원도로 내려갔다. 오후 늦게 출발해서 부광교회에 도착하니 밤 열 시가 넘었다. 평상에 둘러앉아 사모님이 내온 옥수수와 목사님이 구워주는 감자를 먹으며 또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1959년생, 그러니까 올해 쉰셋인 이 목사님은 1997년 4월 서울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다 단돈 200만 원을 들고 친구가 목회하는 이 마을로 왔다. 아내와 아들 둘, 쌍둥이 딸과 함께 친구가 섬기던 교회를 이어 받았다. 예배당이래야 누에치던 방에 딸린 월세 8만 원짜리 작은 방을 개조한 것이었다.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을 주민 한 분이 자녀 학비를 내야 한다며 돈을 꿔달라고 했고, 사정이 안타까워 그야말로 전 재산을 털어 주었다. 수중에 아무것도 없게 되니 오직 하나님만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를 하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서로 마주보며 “그 때 우리 어떻게 살았지? 그래도 굶지는 않았잖아” 하면서 활짝 웃었다.

시골에 내려온 지 1년이 된 1998년 5월. 학교에서 돌아오던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간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목사님 내외는 한줌 재로 변한 아들을 바다에 뿌리며 울고 또 울었다. 사흘을 그렇게 아들을 그리며 울었다. 사흘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또 감사해서 울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큰 슬픔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슬픔을 이기고도 남았다. 주변에서 놀랄 정도로 평안과 기쁨이 밀려왔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의 깊은 맛을 보았다. 아들이 준 선물이었다.

그리고 보상금이 나왔다. 1억이 넘는 큰돈, 생전 처음 만져보는 돈이었다. 그러나 이 돈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이 데려가시며 놓고 간 돈이니 하나님의 돈인 셈이었다. 내외가 마음이 같았다. 기도하는 중에 자신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교회를 새로 시작한 친구 목사에게 이 돈을 헌금했고, 친구는 이 돈으로 어려운 목회자들을 도왔다. 그리고 2년 후, 친구는 임원3리에 땅 1800평을 구입하여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가 감사교회다. 그 후 감사교회 담임 목회자는 몇 번 바뀌었고, 그 자리에 김창수 목사님이 부임한 것이다.

평상에서 자정이 넘도록 대화하며 우리는 참 많은 은혜를 받았다. 마음에 끼었던 누더기들이 씻기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 목사님 내외의 사명감과 목회자로서의 건강한 자부심에 압도되었다. 당당함이 홍해 앞에 선 모세 같았다.

이 목사님은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들이 보고 싶어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빨리 가고 싶다고 했다. 어서 나이가 들기를 바랐다. 이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던 목사님 모습이 평생 내 마음에 남을 듯하다.

이 목사님의 남은 한 아들은 한동대에서 공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아들의 학비만큼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몫으로 주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로님과 의논했더니 같은 마음이었다. 학비가 없으면 휴학하고 한 해 벌어서 다음해 학교 다니고, 또 다음해 학교 다니면 된다는 아들의 생각이 고마웠다. 목사님 내외분께 학비를 우리가 섬기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두 분은 큰 시름을 놓은 듯 너무 기뻐하셨다. 나는 아들 하영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며 기도했다(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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