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현의 감정이 꽃피는 순간


정서적으로 만족한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어린 시절 배고파서 울어대는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아픈 좌절이 떠올라 격렬한 감정으로 반응하기 쉽다. 분노는 이럴 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 된다.

정신분석적으로 짚어보면 분노의 시작점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배고픔이다. 엄마 품에 평안하게 잠든 아기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이며 해결사이다. 배가 고파도, 추워도, 기저귀가 젖어 불쾌해도, 아기는 울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엄마가 다 해주니까. 그러나 아기는 머지않아 세상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만 굴러가는 게 아님을, 울어도 안 되는 게 있음을 배우게 된다. 엄마로서는 최대한 아기를 잘 돌봐주고 싶겠지만, 아이가 울 때마다 즉각 반응하지 못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이 현실에 대한 설명이 우는 아기에게는 안 통한다. 아기에게는 엄마의 마음이 떠나버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원한다고 다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절망할 때, 아기는 좌절과 상처를 함께 경험한다. 그 결과? 아기는 화가 난다. 뒤로 넘어갈 정도로 울음을 터뜨리면서 울부짖는 모습은 분노 그 자체이다. 이렇듯 우리가 배운 분노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하면서 시작됐다.

어른이 된 뒤에도 배가 고프면 화가 나는 건 아기 때와 비슷하다. 단순히 위가 비어서 느끼는 배고픔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들은 다들 쉽게 배고픔을 느끼는 자리를 삶 속에 갖고 있다. 애정에 대한 굶주림은 가장 흔한 배고픔이다. 누구든 사랑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성적인 욕구도 애정의 굶주림 안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지만, 때로는 육체적인 욕구보다 정신적 친밀함에 대한 욕구가 더 큰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정서적으로 만족한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어린 시절 배고파서 울어대는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아픈 좌절이 떠올라 격렬한 감정으로 반응하기 쉽다. 분노는 이럴 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아기는 더욱 기를 쓰고 화를 낸다.

윤서 씨(가명)의 결혼 생활 7년은 남편과의 끊임없는 싸움 7년과 맞먹었다. 결국은 몸도 마음도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병원을 찾았다. 윤서 씨는 선을 봐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연애결혼이든 중매결혼이든, 사랑하고 사랑 받는 가정을 꿈꾸는 게 당연한 법이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그를 버리고 먼저 결혼을 했고, 혼자 남은 남편은 집에서 소개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홧김에’ 결혼을 했다. 문제는 남편을 떠났던 그녀가 결혼 1년 만에 이혼하고는 다시 그에게 연락을 해온 거다.

윤서 씨라고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남편이 마냥 좋을 리 없지만 그 사이 윤서 씨는 임신을 했고, 이혼율이 치솟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이혼녀에게 차가운 사회적인 현실을 생각할 때 도무지 이혼이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윤서 씨에게 자신의 인생에 이혼이라는 흠집을 낸다는 건 사랑 없는 결혼생활보다 더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는 남편에게 윤서 씨는 너무나 화가 났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붙잡은 채 놔주지 않는 윤서 씨에게 정말로 화가 났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우고, 차갑게 서로를 벌주었다. 두 사람을 묶어주는 고리는 서로에 대한 분노, 그리고 반복되는 싸움 때문인지 항상 불안해하고 쉽게 징징거리는 어린 아들밖에 없었다.

윤서 씨는 남편이 이 결혼 안에 있을 때 가장 불행을 느낀다는 걸 알고는 절대로 그를 놔주지 않았다. 자기도 괴로웠지만 남편을 괴롭히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내는 건 상당히 큰 에너지 소모를 초래한다. 좌절감과 분노로 똘똘 뭉친 채 속에서부터 시들어가던 윤서 씨는 무엇보다도 이런 결혼을 선택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바보 같은 선택을 한 자신 역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껍질만 남은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관계로 계속 남아 있게 만듦으로써 고통을 당하게 만드는 게 윤서 씨의 내면이었다.

돈에 대한 배고픔은 또 어떨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가고 있지만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의 절규를 남긴 탈주범들이 있었다. 2006년에 만들어진 영화 <홀리데이>(감독 양윤호, 제작 현진씨네마)는 이 사건을 눈부신 경제적 성장의 이면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했다. 돈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픔이 곧 분노로 치환되는 과정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배고픔이 다 분노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꼭 필요하고 건강한 배고픔도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은 16강에 진출했을 때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I'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다. 더 이기고 싶다는 말을 했다면 당연한 이야기로 넘어갔겠지만, 배고픔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깊은 본능을 건드렸다. 히딩크의 배고픔은 승리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 열망이 가진 전염력의 결과는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이다.

또 어떤 배고픔이 필요하고도 건강할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으로 시작하는 찬양이 있다. 이 찬양의 후렴구에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주는 거룩한 깨우침이 들어 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Lord, I hunger, thirst for Your righteousness. Father come and fill me once again).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채로 오래 있었다면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배고픔 때문에 일어난 분노는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고, 모자란 것을 채워주는 거룩한 분노가 된다. 영국의 정치인이며 노예제도 폐지운동으로 잘 알려진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번 주에 나는 노예들을 실어 나르는 법안과 그 친구들의 수치스러운 태만에 죄스러운 분노를 느끼곤 했다.” 그가 느낀 의의 굶주림은 분노로 이어졌고, 그 분노는 치솟는 화에 끝나지 않고 영국을 변화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분노(소위 의분)를 낳는 배고픔이라면 얼마든 필요하고 건강하다. 느껴져야 할 분노가 없는 그 자리야말로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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