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최은창의 '인생 둘레길'


이제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 사이에 쉬는 것이 필요한 때다. 일상에 시달렸던 고단한 정신, 갈등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쉬는 것이 필요하다. 쉬자. 극성스럽게 놀지 말고 이젠 조용히 휴식하자. 이번 여름휴가는 남의 눈에서 벗어나 쉬자. 여행을 가도 천천히 여유 있게 하자.


1950년대 거의 최빈국이었던 우리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밤과 낮 구분 없이 땀 흘려 일해야 했다. 일 하는 것은 미덕이었고 최고의 가치였으며 노는 것은 곧 부덕이고 죄악이었다. 게다가 천성이 부지런하고 극성스러워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압축 고도성장을 이루고 윤택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놀 줄은 몰랐으므로 일과 함께 가야 할 휴가 문화는 익숙하지 않다.


런빠로 3박 4일? 홍방싱 3박 4일?

그래서 기껏해야 술 마시고, 노래하고, 골프 치는 게 고작이다. 술을 마시면 취할 때까지 마셔야 하고, 노래를 불러도 메들리로 끝장을 본다. 골프도 4박 5일 동안 100홀 이상을 쳐야 직성이 풀린다. 일하듯이 열심히 논다. 여행을 가도 ‘런빠로 3박 4일’(런던, 파리, 로마 각 1박), ‘홍방싱 3박4일’(홍콩, 방콕, 싱가폴 각 1박) 이런 식이다.

바쁘게 빨리 목적지에 가야 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유적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찍자마자 이동한다. 자유시간을 주면 쇼핑에만 매달린다. 이쯤 되면 이건 이동이지 여행이 아니다. 그래서 노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 더 피곤하다.

이제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 사이에 쉬는 것이 필요한 때다. 일상에 시달렸던 고단한 정신, 갈등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쉬는 것이 필요하다. 쉬자. 극성스럽게 놀지 말고 이젠 조용히 휴식하자. 이번 여름휴가는 남의 눈에서 벗어나 쉬자. 여행을 가도 천천히 여유 있게 하자. 휴식(休息)이란 한자는 사람이 나무 밑에서 자기 마음을 가져다 놓는 것을 형상화 했을 것이다.

늦둥이가 없는 중년이라면 아이들에게 종속된 여름방학 피서에서 벗어나 장소와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여름휴가를 가질 수 있다. 아이들과 해수욕장에서 보낸 즐거운 추억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휴가철에 복잡하게 보내는 휴가는 어지간한 인내심이 없이는 휴식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상해서 돌아오기 쉽다. 타인에 대한 무례, 비위생적 환경, 복잡함, 바가지, 교통지옥…, 이런 기억들로 오히려 피곤하다.

아이들이 중고생이 되면 학원과 입시준비로 부모들의 여름 휴가여행은 일정과 장소에 매우 제한을 받는다. 아니 대부분 휴가여행을 반납한다는 편이 옳다. 그렇다고 아이들만 남겨 놓고 여행을 떠나기엔 마음이 편치 않다. 겨우 자녀들의 입시가 끝나고 나이도 50이 넘어야 비로소 부부끼리 여름 휴가여행을 갈 수 있게 된다.
아이들 없이 부부끼리 휴가여행을 떠나면 우선 같이 지내는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진다. 그 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많이 할 것 같지만 대화라는 게 갑자기 시간이 난다고 트이는 게 아니다. 아침에 몇 분 그저 인사하고 저녁에 돌아와선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으니 둘만의 대화를 한나절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한 이불 덮고 자면서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변에는 어떤 일들이 있어났는지, 어떤 감정들이 있었는지 공유하지 못했다. 공통된 화제가 별로 없었음을 여행을 떠나서야 새삼 느끼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고 묻지 말 것

남편과 아내는 이야기 하는 방법이 다르다. 여자는 등장인물의 배경, 성격 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때로는 등장인물과 자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곁들인다. 오늘 말하려는 요점을 절대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의 이야기를 끝까지 집중하여 들어야 하는데 그게 생리적으로 쉽지 않다. 두 손에 신문을 들고 읽으며 대충 건성으로 ‘응응’ 하고 대답하거나, TV를 보고 있거나, 멀쩡히 듣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기 일쑤다. 결론을 말할 때까지 꾹 참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남편들은 과정보다는 결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과정을 건성으로 넘기는 습관이 있다. 이야기 중간에 참지 못하고 ‘결론이 뭔데?’ ‘말하려는 요지가 뭐야?’ ‘요점만 말해’ 하는 식으로 말하기 십상인데 이렇게 말한 날은 큰 싸움을 붙거나 분위기를 망치게 된다. 아내는 이야기 자체보다 자신에 대한 ‘온전한 집중’(undivided attention)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내가 이야기할 때 두 손에 신문 대신 턱을 괴고 좌안과 우안을 번갈아 봐가면서 맞장구 추임새를 넣어주고, 듣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딴 생각하지 말고. 햇반으로 때우지 않으려면 말이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