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위의 그림자 권력에 맞서는, <모비딕>의 이방우 기자에게


당신처럼 우리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맞서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시로 출몰하는 현실 속의 모비딕에 맞서 우리가 승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산산조각으로 난파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매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해야 할 터입니다.


“우리 기자잖아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공대 출신 신참내기 성효관 기자가 물었을 때, 당신도 어금비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전문기자, 수석기자, 대(大)기자가 떼로 덤벼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손진기 기자가 말한 “정부 위의 정부”가 그런 상대일 테지요.

영화는 1994년 11월 20일 서울 근교 발암교 폭파 사건을 보여주는 CCTV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남한사회 교란을 목적으로 한 간첩의 범행이라며 안보정국을 조성함으로써 정국 주도권을 쥐려 합니다. 이미 거의 모든 언론 보도는 정부 발표대로 결론 나는 듯했고, 사건의 전모는 짙푸른 강물 속으로 가라앉아 진실의 파편 한 조각도 건져올릴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고향 후배 윤혁이 갑자기 찾아와 건넨 민간인 사찰 기밀 자료를 확인한 뒤, 당신은 사건의 진실이 조작되었음을 확신하지요.

이제 당신은 손진기?성효관 기자와 함께 특별취재팀을 꾸리고 특종보도를 위해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땐 오락실도 되었다가, 또 어떤 땐 호프집도 되는” 비밀감청팀 사무실을 잠입취재하거나 그들의 배후를 파고듭니다. 그러나 에이햅 선장이 뒤쫓던 백경(白鯨) 모비딕(Moby Dick)처럼 애초부터 그들은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호프집 ‘모비딕’의 배후에 다가갈수록 시한폭탄처럼 도사린 위험이 곳곳에서 터집니다. 특별취재팀 사무실이 쑥대밭이 되어 있거나, 취재 중 괴한들에게 붙들려 모진 폭행과 살해 위협을 당한 뒤 겨우 풀려나거나, 백주 대낮에 납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결국 손진기 기자는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에 목숨을 잃고 말지요. “정부 위의 정부, 정부를 움직이는 또다른 권력”은 당신네 특별취재팀으로도 도저히 맞설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이런다고 니네들 세상이 올 거 같아?”라며 악을 쓴다 한들, 그들의 머리터럭 한 올 건들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잘아는 사실이지요.


물론 ‘대한민국 정부를 움직이는 그림자 권력이 있다’는 음모론을 내건 영화치고는 음모의 그물이 그다지 촘촘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지요? 저 같은 486세대 관객이라면 이미 익숙한 민간인사찰과 간첩조작사건 같은 배경 설정을 2011년에 보게 되는 건 마치 낡은 사진을 보는 느낌마저 들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당신에게 이 글을 띄우는 건 ‘맞설 수 없는 불가항력에 맞서는 법’을 보여 준 당신네 취재팀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당신들을 보면서 어니스트 섀클턴의 남극 탐험대를 떠올렸습니다. 세계 최초의 남극 ‘횡단’ 탐험을 위해 28명의 대원들이 1914년 12월 5일 사우스조지아 섬 그리트비켄 포경 기지를 출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부빙(浮氷)에 갇혀 표류하면서 1년 5개월 여 기간 동안 추위와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사투를 벌입니다.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 섀클턴은 시속 100km의 폭풍과 20m 높이의 파도가 이는 장장 1,000km의 바다를 겨우 6m 길이의 갑판 없는 돛단배로 건너 사우스조지아 섬의 포경 기지에 도착한 뒤, 마침내 구조선을 이끌고 남은 27명의 대원들을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해냅니다. 불가항력의 극한 상황에 맞서 섀클턴 탐험대가 한 일은 하루하루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사냥, 펭귄과 물개 다듬기, 가죽 손질, 숙소 정리, 수선하기 등 자신들의 일과를 성실히 수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매순간 집중한 것이지요.

이방우 기자, 당신네 취재팀이 한 일도 그랬습니다. 후배기자 성효관이 절망스럽게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묻자, 맥없이 주저앉으려던 당신이 결연히 답합니다. “아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 있다.”

그 길로 당신은 신문사로 달려갑니다. 손에 당신의 무기(펜)를 쥐고 반격(기사)을 날립니다. 그림자 권력이 감행하려던, 대규모 2차 음모극에 맞서 당신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결연히 행합니다.

당신처럼 우리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맞서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시로 출몰하는 현실 속의 모비딕에 맞서 우리가 승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산산조각으로 난파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매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해야 할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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