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명가를 만드는 힘 ①생활의 가치를 발견하라


신앙명가를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명가’에다 방점을 찍는다. 자연스럽게 권세 좋고 이름께나 날리는 가문을 추천한다. 그러나 ‘신앙’에 방점을 찍게 되면 달라진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도드라지고 도도한 흐름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열기가 얼굴을 달군다. 박정희 할머니를 통해 들여다 본 이 가문의 힘은 소박하고도 평범하지만 옹골차고 윤기 나는 일상들이 만든 가치이다. 그 중심은 신앙이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의 차분하고도 경쾌한 생활은 수채화를 그리고, 음악을 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고, 욕심을 좇아 허세 부리지 않으며, 그런 삶을 차분히 기록해 간다. 성장주의와 황금만능에 사로잡힌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가문은 어쩌면 캄캄한 밤에 빛나는 별처럼 소중하고 아름답다.

인천 어머니는, 내가 아는 한, 한 번도 세속적으로는 남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지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평생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고, 가난한 교회를 섬겼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많은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 누이, 어머니, 할머니로서 살았다. 그녀의 주위는 늘 온갖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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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할머니는 올해로 아흔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딸로 태어났는데, 송암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한글 말살정책에 위기를 느껴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신·구약을 점자로 처음 만들어 시각장애인의 교육과 선교에 평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그러한 아버지 밑에서 ‘박애주의’와 ‘교육‘의 중요성을 남달리 느끼며 성장하였다.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인천 제2송림보통학교 교사와 화도유치원 원장, 인천 화도감리교회 장로로 열심히 살았다.

1944년 평양의 초대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유두환 선생의 장남이자 평양의전을 졸업한 의사 유영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다. 남편 역시 한 번도 풍요로운 삶을 택하지 않고 한 길을 묵묵히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슬하에 명애 현애 인애 순애 제룡 등 4녀 1남을 두었다.
전쟁 치르는 나라에 살면서 고생하지 않은 여인네들이 있을까. 인천에서 전쟁을 겪었다. 전쟁 중에 평양에서 시댁 식구들이 내려왔다. 며느리면서 딸과 엄마로 박정희 씨는 스물세 명이나 되는 대가족 살림을 맡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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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한 이야기만으로는 그녀의 한쪽 면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이 다사다난한 살림살이를 하면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고, 기도를 했다. 삶의 온통 예쁜 색깔들이 그 전쟁통에도 퇴색하지 않고 울긋불긋 파릇파릇했다.

맏사위 권태환 씨(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나의 장모님’을 이렇게 그려낸다.
“인천 어머니는, 내가 아는 한, 한 번도 세속적으로는 남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지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평생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고, 가난한 교회를 섬겼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많은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 누이, 어머니, 할머니로서 살았다. 그녀의 주위는 늘 온갖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남편을 여의였을 때는, 세무서 직원이 병원 간판을 떼어 가 그 뒤에 ‘평안 수채화의 집’이라고 써 가지고 와서 다시 제자리에 달아 놓았다. ‘수입도 없는데 할머니 전기세라도 줄여 드려야겠다’고 한 일이란다. 그래서 또 간판을 보고 여러 사람이 찾아온다. 그 수채화 교실이 정말 진풍경이다. 한번은 내가 갔을 때, 거기에는 초등학교 학생, 공장 노동자, 그 집 문 앞에서 풀빵 파는 아주머니, 뇌성마비 청년, 지체장애우, 수녀님, 스님, 목사님이 한자리에 모여 즐겁게 웃으면서 함께 신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모두가 인천 어머니가 좋단다. 누가 자기 같은 사람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눈과 마음만 있으면 그리지 별거냐?’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란다.”

박정희 할머니는 맏사위가 이야기한 그대로다. 몇 차례 할머니를 찾아뵙고 가진 느낌이 딱 그대로다.
그래, 이 가문은 누가 뭐래도 내가 그리려는 그 신앙명가다. 정승이 나오거나 세도가를 내지 않았어도 그 기품으로 따지면 이 댁만 한 가문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가문의 이음새 한 부분을 차지하는 어른이 박정희 할머니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이 가문이 가진 명가의 힘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그 힘이란 무엇 하나로 뚝 떼어내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가문, 특히 박정희 할머니가 가진 ‘무엇 하나’를 얻으려고 한다. 특히 그것은 우리 시대를 그리스도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놓쳐버렸거나 가벼이 여김으로써 이제는 참으로 희귀해진 어떤 것이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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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할머니는 TV에도 소개되고 책으로도 알려졌다. 그럴 때마다 이야기의 중심엔 늘 ‘육아일기’가 있었다.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1945년부터 1960년대 중반에 쓰였다. 다섯 남매에게 한 권씩 모두 다섯 권의 일기를 쓴 셈이다. 일기라고 하지만 아이들이 주인공인 동화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교회에서 너무 낡아 버리는 악보를 가져와 이면지에다 쓰고, 베넷이불로 덮던 호청을 이용해 겉표지를 씌웠다. 도비라 머리말 목차까지 뚜렷하여 제법 책의 모습을 갖추었다. 아이들은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글을 익힐 무렵이면 엄마로부터 이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현재 국가기록원의 기록물로 보존되어 있는데 해방 직후부터 전쟁기간에 한 가정의 소소한 일상은 물론 당시 시대상황을 그려낸 ‘작은 역사’로도 평가받고 있다.
육아일기가 방송과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사람들은 육아일기 쓰기 모임을 만들고 할머니로부터 육아일기 쓰기 공부도 하였다. 육아일기와 좋은 엄마의 상관관계를 따져보면 아마도 연결 끈 하나쯤은 발견될 것이지만 그것이 내가 박정희 할머니로부터 얻으려는 ‘힘’의 근원은 아니다. 육아일기를 쓰게 하고, 수많은 이웃들을 가까이 불러오며,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존재하더라도 누구나 그 볕을 쬐려고 모여들게 만드는 힘, 그 뿌리를 얻고자 한다.

‘생활의 발견’이 아닐까? 임어당이 그의 수필집 <생활의 발견>에서 언급한 그것 말이다.
“너무 높은 데를 노리지 않고 이렇게 낮은 곳에 있어서 땅에 달라붙어 흙처럼 되어 버린다 해도 나는 아주 만족한다. 내 마음은 흙이나 모래 속을 유쾌히 노닐며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리라. 이 지상 생활에 도취할 때 우화등선(羽化登仙)했는가 싶을 만큼 마음이 경쾌해지는 일이 흔히 있는데, 사실은 지상 2미터도 떨어지는 일이 드문 것이다.”

송암 선생과 유두환 선생이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방식을 잘 살펴보자. 이들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믿음에 천착하였고, 그 증거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의 희망을 비전으로 삼았으며 나름의 길에서 옹골차게 제 인생을 헌신하였다. 지식인이라 일컬어지던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버리고 넓은 길로 갈 때도 두 어른은 곁눈질 하지 않고 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생활’이 무엇인가. 남의 숨이 아니라 제 숨으로 호흡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목숨과 삶을 이어간다. 나는 삶이며 삶이 나인 동체(同體), 그것이 생활이다. 허공에 발을 두면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초조하다. 흙 속에 발을 묻어서도 움직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활은 묘한 긴장감을 지닌다.

박정희 할머니의 생활은 평화롭다. 제 숨으로 호흡하는 생활이다. 그래서 당당하고 활기차다. 두려움도 칙칙함도 경박함도 없다. 하늘을 나는 전투기에서 폭격소리가 들리는 전쟁통에도 엄마로서 박정희 씨의 생활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첫째 명애 씨의 육아일기에 그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폭격과 우리들”이란 제목의 글을 옮겨 본다.

‘꽝’ ‘꽝’. 야! 무서운 소린데….
“저거는 나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나님이 폭탄을 떨어뜨리시는 게야.”
“잘못해서 다른 데로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하나님 나라로 가지.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운 꽃도 많고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많아요.”
“우리 재미있게 피난 가는 장난하자!”

너희들은 이러한 소리를 매일하며 할아버지는 지붕에서 유엔군 비행기들의 유희하듯 폭격하는 구경을 하시고, 나와 순임이는 벼를 매에 갈아 현미밥을 짓고 보리쌀을 곱게 갈아 죽도 쑤고 고구마 순을 다듬어 된장국도 끓이고 하여 무서운 생각은 아니하고 캘캘대며 날을 보냈다.

나는 이 글에서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유태인 수용소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게임을 제안하던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1000점을 얻으면 탱크를 상으로 받는다”는 거짓말로 아들을 몰래 숨겨두고 보호하던 아빠의 그 유쾌한 인생살이가 박정희 할머니에게도 엿보인다. 이미 60년 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처절한 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그녀는 아이들과 캘캘대며 보냈다.

정녕 그 ‘힘’의 근원은 마땅히 ‘믿음’이다. 맏사위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매일매일이 인천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날이다. 그녀는 감사와 간구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일에 눈물로 감사하고 성령의 인도를 구한다. 그리고 힘찬, 기쁨에 넘치는 하루가 이어진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녀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믿기에 힘을 얻는다. 그리고 어려울 때는 찾아와 의논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알리기 위해 바로 달려온다. 아예 온 가족이 함께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녀의 입에서는 늘 창조주에 대한 찬양이 흘러나온다. 아직도 나에게는 그녀의 일상이 신비롭다. 나는 시편 92편을 읽을 때마다 인천 어머니를 떠올리고, 인천 어머니를 생각하면 시편 92편이 떠오른다.”

시편 92편은 이렇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노래하는 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사오리까? 아침에 당신의 사랑을 알리며 밤마다 당신의 미쁘심을 전하는 일, 그보다 더 좋은 일은 다시없사옵니다. 열 줄 비파와 거문고를 뜯으며 수금가락에 맞추어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업적 생각하며 이 몸은 행복합니다. 손수 이루신 일들을 앞에 그리며 환성을 올립니다. 여호와여, 하신 일이 어이 이리 크시옵니까? 생각하심 또한 어이 이리 깊으시옵니까? 여호와여, 당신만은 영원토록 높으십니다.…의로운 사람아.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아라. 우리 여호와의 집안에 심어진 자들아 하나님의 뜰에 뿌리를 내리고 우거지거라. 늙어도 여전히 열매 맺으며 물기 또한 마르지 말고 항상 푸르러라. 그리하여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께서 굽은 데 없이 곧바르심을 널리 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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