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우리들을 위한 중보


‘건강상의 이유’로 군 면제를 받은 연예인이 근육질을 자랑하며 TV에 나올 때였습니다. 천천히 우리 내부만을 둘러보았습니다.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둔 김 상병, 처자식을 위해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모았던 김 병장님, 대퇴부골절로 달릴 수 없었던 이 일병 등 누구 하나 사연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면제를 받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 같은데, 하나같이 꼼수를 부릴 줄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총을 겨눌만한 심성들도 아니었지만, ‘평화’를 외치며 징병의무에 맞설만한 담력 있는 이들은 또 아니었습니다. 적당한 애국심으로 나라를 지키던 평범한 군인들이었지요.

어느 깊은 밤, 갑자기 내무반에 불이 켜졌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장교들이 우리를 앉혀놓은 채, 외박 나간 신 일병의 자리를 뒤집니다. 일기장, 책, 칫솔, 치약, 비누, 핸드크림 등 이제는 여기에 필요 없다는 듯 가져가 버립니다. 애인에게 헤어짐을 통보받고, 해서는 안 될 결정을 한 것입니다.

다음 날, 조사가 진행되고, 내무반에서는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TV에서는 <개그콘서트>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문득 이틀 전, 신 일병과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순박했던 그는 머뭇머뭇하다가 어렵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이 상병님...저기...혹시...건전지 남는 거 있으십니까?”
“있지~, 창고에서 몇 개 챙겨다 줄게.”
“감사합니다. 외박 다녀와서 찾으러 가겠습니다.”

한동안 제 자리엔 주인을 잃어버린 건전지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신 일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무반 식구들은 ‘무사고’ 푯말이 뽑혀 움푹 팬 화단을 볼 때마다, 비워진 그의 자리를 지날 때마다, 그를 떠올렸겠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내뱉지는 못했습니다. 더 슬퍼질 것 같아서, 못 견딜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약속이나 한듯, 아무도 곳곳에 붙은 그의 이름들은 떼지 않았습니다. 그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기억에서마저 잊히는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친근하게 더 건네줄 수는 없었을까, 나 자신의 잘못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물어봅니다.
‘경섭아! 잘 있지?’


총기 난사사건으로 사회가 또다시 충격에 빠졌습니다. 소중한 생명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그곳에선 세상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같이 지내던 이들에게 이름 한 번 더 불리지 못하고 ‘없어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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