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우리


영화 제목 ‘인사이드 잡’(inside job)은 ‘내부자 소행’이라는 뜻으로, 내부 세력이 일으킨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화는 차분하고도 냉정한 톤으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주범을 월스트리트의 금융 권력자들과 그들의 재정 후원을 받은 경제 전문가들이라고 지목합니다.

 
“이 위기는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규제를 벗어난 (금융) 산업이 일으킨 것이었다.”
“수십 년 간 미국 금융 시스템은 안정적이고 안전했다. 그런데 뭔가 변해버렸다. 금융업은 사회에 등을 돌려 정치 시스템을 부패시키고,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금융 위기를 초래한 사람들과 기관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

<인사이드 잡>은 2008년 미국 발 글로벌 경제 위기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원인과 진행 과정, 책임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올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작품상을 받은 이 영화는, 극영화를 능가하는 논픽션 영화의 힘을 제대로 보여 줍니다.

영화가 다루는 금융 위기 즈음, 서울은 도심 재개발의 여파로 전셋집 구하기가 팍팍해진 시절이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회사의 부도가 미국 경제를 덮쳤다는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지요.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게 우량 등급(prime)보다 급이 낮은(sub-prime) 장기주택담보대출(mortgage) 상품인데 (주택담보대출 상품 중 최저 등급으로 신용도 낮은 개인에게 2-4% 더 높은 금리를 받고) 주택 가격의 99.3%를 대출해주고 집을 사게 했다니 “미친 짓”이라는 말이 나올 만했지요.

6, 7년 전인가 우리나라에서도 ‘모기지론’이라는 말이 돈 한 푼 없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앞당기는 마술처럼 언론에 보도된 기억이 나는데, 경제 까막눈이던 나는 ‘모기지’(mortgage)란 말에서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mortgage의 어근 ‘모르’(mort)는 불어로 죽음이라는 뜻인데, 영어 ‘게이지’(gage)에 담보물이란 뜻이 있으니까 ‘죽음의 담보물’ 쯤 되지 않을지요.)

당시 미국 발 세계 금융 위기는, 다달이 전세자금 대출 이자만 겨우 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월급쟁이에겐 그리 실감 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내겐 여전히 직장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인사이드 잡>에 나오는 인구 30만의 강소부국 아이슬란드의 국가 부도나 중국 농민공을 포함한 수천만 월급쟁이들의 실직, 미국 플로리다 주의 텐트 시티(개인 파산자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텐트 촌)는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대체 이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냐는 거지요. 영화 제목 ‘인사이드 잡’(inside job)은 ‘내부자 소행’이라는 뜻으로, 내부 세력이 일으킨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화는 차분하고도 냉정한 톤으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주범을 월스트리트의 금융 권력자들과 그들의 재정 후원을 받은 경제 전문가들이라고 지목합니다.

앨런 그린스펀(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전 의장), 로버트 루빈(골드만삭스 CEO 출신으로 현 미국 재무부 장관), 래리 서머스(하버드대 교수·총장 역임), 행크 퍼슨(골드만삭스 CEO 출신으로 부시 정부의 재무부 장관 역임) 등 이들은 하나같이 금융투기 규제 정책을 폐지하는 정책을 입안하고 주창한 인물들입니다. ‘규제 완화 열심당’인 그들은 리먼브러더스(투자은행), 골드만삭스(투자은행 겸 증권회사), 메릴린치(증권회사), 씨티그룹(세계 최대 금융기업), AIG(세계 최대 보험회사), 무디스·S&P·피치(세계 3대 신용평가기업) 등으로 결성된 “탐욕의 먹이사슬”을 통해 오로지 자신들과 소수 금융 자산가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경제 정책을 사유화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개혁 정책 책임자가 되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클린턴-부시-오바마 정부를 싸잡아 ‘월스트리트 정부’라고 비판하는 이유입니다.

철저하게 현실적인 투자 원칙을 고수한다는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은 2008년 경제 위기가 있기도 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관련된 MBS(주택 담보부 증권), CDO(부채 담보부 증권), CDS(신용 부도 스왑) 같은 파생 금융 상품을 가리켜 “대량 살상용 금융 무기”(Weapons of Financial Mass Destruction)라고 지적했다지요(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312쪽). “결코 충분한 적이 없었던” 그들의 소유욕과 탐욕은 미국 국민 하위 90%의 손실을 상위 10%의 이익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영화의 지적에서, “공적 손실 위에 거대한 사적 이익”을 쌓아올리는 그들의 부도덕한 탐욕을 엿보게 합니다. 이익은 자기네 주머니에 알토란 같이 챙겨 넣지만 손실은 털끝만큼도 지지 않고 공적 자금(그러니까 국민 혈세)으로 해결하는 방식 말이지요. 장하준 교수 식으로 말하자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인 셈이지요.

<인사이드 잡>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과는 달리, 차분하고 냉정하면서도 예리하게 금융 위기의 전후 맥락을 파고듭니다. 영화는 차분하고 점잖은데, 보는 이의 심장은 분노로 요동칩니다. 이 영화가 독립영화 전용관에서만 상영 중인 것도 인사이드 잡이었을까요?

<인사이드 잡>(Inside Job), 맷 데이먼 해설 / 찰스 퍼거슨 감독, 2011. 5. 19.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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