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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들 때 물어볼 것 '꼭 필요한가? 이 정도면?'
문지현의 감정이 꽃피는 순간
[110호] 2011년 06월 26일 (일) 문지현 @


죄책감이 ‘꼭 필요한 자리에’ ‘적당히’ 있으면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연주 씨는 지각하는 버릇을 고치고, 연주 씨의 동생은 갖고 싶던 가방을 얻고, 연주 씨의 남자 친구는 포기했던 주말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니까.

연주 씨는 이미 직장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아직 지하철 안에 있다. 늦잠 자는 습관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는 상사가 으름장을 놓았다. “연주 씨, 이번 달에 벌써 세 번째 지각이야. 다음에 또 지각하면 벌 당직이라도 해야 되겠어. 응?”

연주 씨가 아침에 눈을 떠 시계를 바라보면서 ‘허걱’ 하고 있을 때 일찍 일어나 꽃단장을 마친 여동생이 가볍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언니 이제 일어났어?”
“야, 넌 일찍 일어났으면 언니를 좀 깨워야지!!”
후다닥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면서 연주 씨는 동생에게 버럭 성질을 냈다.
“내 참, 내가 언니 알람시계야? 내가 언니가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 어떻게 알아?”
동생도 지지 않고 마주 성질을 부렸다.

연주 씨가 회사에 들어선 시각은 아침 회의시간에서 20분이 지나 있었다. 상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서는 연주 씨를 물끄러미 쳐다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의를 지속했다. 회의를 마친 뒤 상사는 연주 씨에게 잠깐 자리에 남으라고 했다. 올 게 왔구나.
“참, 연주 씨만 남지 말고, 혜진 씨가 연주 씨 동기지? 그 자리에 같이 좀 있어요.”

응? 이건 뭐지? 다른 직원들이 회의실에서 다 나간 뒤, 연주 씨와 혜진 씨, 상사 이렇게 셋이 남았다. 상사는 화를 내지 않은 채 (이게 더 무섭다) 토라진 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이야기를 했다.
“연주 씨, 시간 엄수는 사회생활의 기본이잖아요. 연주 씨가 열심히 하고 잘 하는 사람인 건 잘 아는데, 자꾸 지각을 하니까 잘 하고 있는 것도 가려져서 안 보인단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연주 씨가 좀 달라질까 생각해봤는데…혜진 씨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그때 얘기했던 벌 당직을 혜진 씨까지 같이해서 이번 주 내내 서줬으면 좋겠어요. 동기를 챙기는 건 동기의 의무이기도 하니까.”

상사가 나간 뒤 흐르는 어색한 침묵. 연주 씨는 혜진 씨의 눈치를 살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혜진 씨가 작게 투덜거렸다.
“나, 오늘 데이트 약속 있었는데.”
“정말 미안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됐어, 할 수 없지 뭐. 우리 상사가 개인 사정 다 봐주는 사람도 아니고, 입에서 한 번 나온 말이니까 바꾸려고 하시지 않을 거야.”
“혜진 씨, 나 때문에 이렇게 되어서 정말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내가 다음 달에 혜진 씨 야근 당직 대신 서 줄게.”
“그건 고맙지만 그래도 오늘 건 돌이킬 수 없겠네요. 몰라, 지금은 화낼 것 같으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연주 씨 마음에서 죄책감이 솟구쳐 오른다. 나 혼자만 벌을 세웠다면 이 정도까지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죄책감이 얽혀 들어간 그 자리는 너무 아프다. 정말, 다시는 지각하지 말아야겠다. 그날 오후, 연주 씨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날아든다. “언니, 회사에서 괜찮았어? 오늘 아침에는 미안했어.”

동생이다. 혜진 씨에 대한 죄책감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 작은 바람이 분다. 사실 내가 잘못한 거였는데 괜한 동생에게 성질을 부렸네. 동생의 메시지는 연주 씨 마음속에 애꿎게 욕먹는 불쌍한 동생의 모습을 연달아 재생해 주었다. 그런 걸 다 받아주면서 그래도 언니라고 따르는 걸 보면 걔도 참 괜찮은 애야. 연주 씨는 답장 메시지를 날린다. “별로 괜찮지 않았지만, 이젠 괜찮아. 아침에 나도 잘못했어. 그때 너랑 같이 백화점 가서 봐놨던 가방, 언니가 이번 주말에 사줄게.” 딩동~. 바로 메시지가 도착한다. “ㅎㅎ 안 그래도 되는데~ 암튼 고마워 언니 사랑해!”
동생도 똑같이 걸쩍지근한 죄책감을 느낀 터였다. 자기가 안 깨워줬다는 사실 때문에, 지각해서 또 다시 점수가 깎일 언니 때문에, 허둥대느라 아무 말이나 막 했을 언니에게 성질을 부렸다는 사실 때문에.
벌 당직 때문에 연주 씨도 남자 친구랑 주중에 영화 보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지각 벌 당직이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냥 회사가 요새 너무 바쁘다고, 계속 야근이라고 작은 거짓말을 했다. 순둥이 남자 친구는 연주 씨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우리 애인 힘들게 하는 지독한 직장’이라면서 투덜거렸다. 연주 씨 상사에 대해서도 ‘분명 가정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자기가 집에 들어가기 싫으니까 직원들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다!’라며 험담을 늘어놨다.

그 얘기를 듣는 연주 씨,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잘못도 없이 덤터기로 욕을 얻어먹는 상사를 생각하니 상당한 무게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얼굴 보기 힘들다며 칭얼대는 남자 친구에게도.
“알았어. 이번 주말 약속 취소하고 자기랑 만날게.”
“그래? 주말에 친구들이랑 만나야 된다고 나 못 만난다고 했잖아.”
“그치만 나 때문에 주중에 했던 약속 취소했으니까 할 수 없지 뭐. 암튼 미안해.”
전화를 끊으면서 연주 씨는 친구들 생각에 또 다시 마음이 찜찜하다. 대학 때 친구들이랑 한 달에 한번은 꼭 만나자고 약속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만나오고 있는데, 벌써 결혼한 친구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나오고 있다. 때로는 귀찮아서 모임을 건너뛰고도 싶지만 죄책감에 민감한 연주 씨는 약속을 깨는 데 대한 죄책감을 느끼느니 좀 피곤하더라도 모임에 참석해서 친구들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편하다.
 
죄책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겼다가 사라지는 감정이다. 죄책감이 ‘꼭 필요한 자리에’ ‘적당히’ 있으면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연주 씨는 지각하는 버릇을 고치고, 연주 씨의 동생은 갖고 싶던 가방을 얻고, 연주 씨 남자친구는 주말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니까. 문제는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닐 경우와, 적당하지 않은 경우에 생긴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느껴지는 죄책감을 잘 다룰 수만 있다면 조절가능성은 얼마든지 생긴다.

연주 씨가 친구들과의 모임을 펑크 낼 생각 때문에 지나치게 죄책감을 느낀다면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는 마냥 미뤄지게 된다. 때로는 친구가 연인보다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친구를 연인보다 앞세우면 제대로 된 연애를 하기가 어렵다. 죄책감을 느낀다면 ‘이게 꼭 필요한 자리인가?’ ‘이 정도면 적당한가?’라고 물어보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다. 둘 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담고 있기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죄책감을 받아 안으려고 노력해보자. 그러면 이 감정은 지나간다. 결국은, 죄책감도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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