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들으며 하나님 목소리 듣는 날


시인을 만드는 엄마는 따로 있을까?
아니면, 시인은 타고 나는 걸까?
모른다. 아이 둘 키우면서 서로 다르게 크는 걸 보면 타고 나는 것이지 싶다가도 나희덕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마아빠의 영향이 절반이지 싶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밤에 개울을 건넌 적이 있다. 지금 내 아이가 그러듯이 어린 나도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으리라.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하나님 목소리를 들어봤어요?”
“그럼, 들었구말구.”
“어떤 목소린데요?”
“마치 저 물소리들을 합쳐놓은 것 같지.”
나는 물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거렸고, 또렷하지는 않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어떤 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불빛에 반짝이는 물비늘의 모습은 낮에 볼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머니 무릎 아래서 키워온 신앙은 거의 잃어버렸다. 어린 시절 주머니에 불룩하던 유리구슬들이 하나둘 어디론가 굴러가버린 것처럼, 신앙뿐 아니라 세상을 향한 맑은 눈도 잃어버렸다. 그래도 물가에 앉을 때면 그 많은 물소리 속에서 어떤 음성이 섞여 들리는 것 같아 귀기울이곤 하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 글은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반통의 물>(창비 펴냄)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 조각이다. 보육원 총무로 일한 어머니였으므로 친딸에게 다른 부모들처럼 자잘한 사랑을 못 주었으나, 시인인 딸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수많은 시심(詩心)을 울려준 듯 보인다.

개울을 건너면서 물소리들을 합쳐놓은 게 하나님의 목소리 같았다고 말할 때, 어머니는 이미 시인이었고, 딸은 어머니의 시심을 공유하였을 테니까.

바쁘다, 돈이 없다, 배움이 짧다, 태어난 게 그렇다…, 그런 온갖 핑계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주신 작은 샘 하나 찾아볼 일이다. 그 샘에서 시를 품는 마음 한 자락 이끌어낼 수 있어서, 아이와 더불어 그 마음을 들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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