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사람 '마지막 광복군' 김준엽 선생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지금 이 형벌은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다. 우리 후손들에겐 결코 이런 고생을 물려주지 말자”고 다짐하며 그는 7일간 눈보라를 뚫고 파촉령을 넘는 6000리 대장정을 마쳤다.


지난 6월 7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사회과학원 이사장)이 향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항일투사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시대의 지성' '시대의 스승'이라 불리던 분이다.

선생은 1944년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했으며,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돼 특수공작훈련을 받은 뒤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복무했다. 노년에 건강 비결을 물으면 "특별히 운동하는 건 없어. 유격훈련 혹독하게 받고 공동묘지에서 돌베개로 잠들고 했던 게 도움이 되나 봐"라고 대답할 만큼 혹독한 시간을 조국 광복을 위해 바친 분이다.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할 때 고 장준하 선생과 만나 함께 파촉령을 넘게 되었다. 파촉령은 남양에서 중경으로 가는 길목에 가로놓여 있으며 거친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데 제갈공명조차 넘기를 꺼렸고, 심지어 제비도 못 넘고 포기한다는 전설의 험산준령으로 일본군도 거기서 진군을 멈췄던 곳이다. 선생은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지금 이 형벌은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다. 우리 후손들에겐 결코 이런 고생을 물려주지 말자"고 다짐하며 7일간 눈보라를 뚫고 파촉령을 넘었다고 한다. 장대한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팔로군과 신사군, 그리고 국부군 지역을 넘나들며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눈 덮인 파촉령을 맨 몸으로 넘어 중경 광복군 부대로 들어섰다. 이것이 그 유명한 ‘6000리 대장정'이다.

1976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원 장관을 맡아달라고 제의했을 때 부인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일언지하에 맡지 말라고 잘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준엽 선생은 세 차례의 총리직을 포함해 열두 차례나 관직을 제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함으로써 ‘고사총리’란 소리까지 들었다.

김준엽 선생의 대학 총장 시절 일화는 유명하다.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여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한 사람이 김준엽 선생이다.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 총장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들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새우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이듬해인 1984년 가을에 학도호국단이라는 어용 학생회가 총학생회로 대체되었을 때 전두환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 총장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고 한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이다. 지금 제자들이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는데 밥이 넘어가느냐'며 호통을 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 총장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 총장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선 학생들이 잘리고 고려대에선 총장이 잘리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개학하자마자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총장을 돌려 달라” 시위였다.

당시의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경찰에 쫓겨 다닌 반면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떠밀려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총장을 돌려달라는 시위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시위에는 '교직원들도 참가했고, 수위 아저씨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그 이후 선생은 그때의 학생들을 만나면 '고마웠네'라며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그렇게 총장 노릇을 했으니, 국무총리 자리보다 높은 자리였지. 높은 총장 자리에 있다가 어떻게 아래 자리로 내려가나"라며 껄껄 웃었다 한다.

정권이나 정부에, 또 학교재단 측에는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했지만 교수와 학생들을 송구스러울 만큼 존중해 준 총장으로 사람들은 기억한다. 교수에게 자문을 구할 것이 있으면 교수연구실로 총장이 직접 찾아가곤 했을 정도다. 걸어간 족적 그대로가 이 나라의 역사였다.

선생은 이렇게 지난 일들을 회고한 적이 있다. “정말 보통 대가를 치른 게 아니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겪은 거지. 그래도 목숨 걸고 투쟁하길 잘했어. 그러지 않았으면 어떻게 자유·정의·진리라는 말을 제자들 앞에서 할 수 있었겠어.”

변상욱
CBS 편성국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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